여러분은 <옥자>를 '어떻게' 보셨나요 좋게, 나쁘게 그런 거 말고, 영화를 보신 '방법'이요. 저는 넷플릭스를 이용해 휴대폰으로 봤습니다. 대형 멀티플렉스들이 넷플릭스 동시 개봉에 항의하다 결국 개봉을 거부해버리는 초유의 사태가 있었죠. 영화는 스크린으로 봐야 제맛이라 생각하지만 가까운 곳에 상영관이 없어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휴대폰으로 신작을 보니 장점이 있더군요. 일단 신작 영화를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볼 수 있고요. 보다가 중간에 잠시 끊거나 인상적인 장면을 그 때 그 때 되감아 다시 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평 쓰는 입장에서 제일 좋았던 건 마치 인터넷 강의를 듣듯 필기를 하면서 영화를 볼 수 있었다는 점이었어요.
하지만 영화학적으로 말하면 저는 영화를 본 것이 아닙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영화는 '보러 간다'고 표현하죠. 연극이나 뮤지컬처럼 객석이 있고 스크린이 있고 화면 비율을 맞추어 상영하는 그것을 전공서에서는 영화라고 부릅니다. 넷플릭스를 텔레비전에 연결해 보신 분들 중 화면비율을 달리해 보신 분들도 촬영감독에게 미안해 하셔야 합니다.
이미 우리는 영화관이 아닌 다른 곳에서 다른 기기들로 영화를 보지만, 어쩌면 그렇게 보는 영화들은 그냥 '동영상'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극장보다 IPTV시장에서 더 대박이 나는 영화들도 숱한 이 시대에 언제까지 옛기준으로 영화냐 아니냐를 따져야 할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 글의 목적은 제가 이 <옥자>라는 영화인지 동영상인지 모를 무언가를 보면서 느낀 점을 나누기 위함이지, 칸 영화제에서부터 이어져온 입씨름을 의미없이 이어가고자 함이 아니거든요.
메시지가 가장 직설적인 봉준호의 영화
영화를 보면서 필기한 노트에 저는 가장 큰 글씨로 '정치 영화'라고 써 놓았습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항상 사회적 주제를 다뤘죠. 전작 <설국열차>가 사회 계급의 문제를 다뤘다면 이번엔 기계식 축산 및 식품 유전자 조작과 동물 실험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영화는 봉준호 감독의 다른 전작들보다 그 정치성이 더 짙게 느껴지는데, 이는 영화 속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이 '비유'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작 <설국열차>를 다시 한 번 언급하겠습니다. 영화에서 꼬리칸은 개발도상국의 시민이나 난민 등을 뜻했고 송강호 씨가 연기한 남궁민수는 노동자 계급의 상징이었죠. 이들은 생산 수단을 상징하는 엔진을 획득하기 위해 앞 칸으로, 앞 칸으로 전진합니다.그 전작 <괴물>을 볼까요. 영화 속 괴물은 안보 위협 내지는 전염병 등의 상징으로 해석될 수 있었고 괴물에게 딸을 납치당한 주인공 일가족은 자기 딸을 찾기 위한 과정에서 국가 시스템의 비리와 무능을 상징하는 다양한 사건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하지만 <옥자>는 사정이 달라요.'옥자'는 미란도사를 통해 개발된 유전자 조작 동물이며 홍보에 사용된 뒤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도축될 운명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동물권이나 축산 산업에 대한 고발과 일치해요. 맛을 좋게 하기 위해 한 짐승의 생을 완전히 파괴해버리는 일은 지금도 벌어지고 있잖습니까.
게다가 기차가 통째로 날아가버리는 것으로 끝났던 <설국열차>나 다른 집 아이를 데려다 키우는 결말로 끝이 났던 <괴물>과 달리 이 영화의 결말은 다소 뻔합니다. 다문화적인 면에서 전작인 <설국열차>와,지구상에 없는 생명체가 제목의 주인공이란 점에서 전전작인 <괴물>과 유사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독의 다른 전작들과 결이 다르게 느껴지는 덴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미자, 미란도, AFL... 세 개의 폭주기관차
스토리만 직설적인 것이 아닙니다. 옥자의 친구이자 영화의 '사람 주인공'인 미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두 번 고민하지 않아요. 옥자가 없어졌다 그럼 찾으러 가는 겁니다. 서울 갈 돈 저금통 깨면 됩니다. 옥자가 트럭을 탔다 그럼 그 트럭 위에 뛰어 내리면 그만이에요. 영화 후반에 이르면 미자는 피투성이가 돼요. 하지만 여전히 씩씩합니다.제임스 본드가 해야 할 액션을 '어린 여자애'가 하는 걸 보는 느낌인데, 그 쾌감이 상당합니다.
다른 주인공들도 일직선으로 내달리긴 마찬가지입니다. 미란도의 목표는 자신의 아빠와 달리 자신이 사이코패스가 아니란 사실과 재수없는 언니보다 수완도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한편, 슈퍼 돼지 관련 자신이 벌인 사업을 성공시키는 것입니다. 슈퍼 돼지를 키우는 리얼리티 쇼 스타일의 콘테스트를 벌일 때까지만 해도, 유명 동물 프로그램 진행자를 섭외 할 때까지만 해도 미란도에겐 이성이란 게 있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한국이란 나라에서 미자라는 애가 자신을 귀찮게 하면서부터 사정은 달라지죠.
이에 맞서는 과격 동물보호단체 사람들은 더 설명할 것도 없습니다. 옥자를 실험실로 되돌려보내는 거대한 실수를 하긴 하지만 이들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미란도 사의 비리를 밝혀 슈퍼 돼지 사업을 중단시키는 것입니다. 미자가 엮이면서 그 목표는 옥자를 미자에게 돌려주는 것으로 더 구체화되고요. 이들 역시 일단 목표가 한 번 정해지면 한강물에 몸을 던지고 고의로 교통사고를 내는가 하면 기업 행사장에 난입해 비리 동영상을 틀어버리는 등 조금도 고민하거나 옆을 보지 않습니다.
이렇다보니 영화는 정말 쉴 틈이 없습니다. 미자와 미란도,그리고 동물 보호단체 ALF 이 세 구성원이 모두 막무가내 스타일이라 두 시간이 넘는 꽤 긴 영화임에도 관객들은 숨이 가쁩니다.
매운탕 생선과 옥자
적잖은 관객들이 옥자는 그렇게 애지중지하면서 매운탕도 해 먹고 닭백숙도 해 먹는 미자네 두 식구의 행동이 이율배반적인 게 아닌지 되묻더군요. 그러나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이들은 모든 가축을 방생해 키웁니다. 또한 매운탕용 생선 낚시를 할 때도 치어는 놓아주죠.
즉, 미자네 역시 육식을 하긴 하지만 자신들의 고기가 돼주기 위해 한 개체의 삶을 망가뜨리는 일은 하지 않아요. 영화에 직접 묘사되진 않았지만 슈퍼 돼지를 크게 키우기 위해 약물을 쓰거나 학대를 한 농가들도 분명 있었을겁니다. 그러나 우승컵은 결과 따윈 제쳐두고 굴러다니는 과일 먹이며 들판을 마음껏 뛰놀게 하는 방식으로 키운 '옥자'에게 돌아가죠. '자연대로 키운 돼지가 결국엔 가장 잘 컸더라'는 설정엔 분명한 함의가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옥자>는 영화 속 극렬 동물보호단체 ALF의 입장을 대변하지는 않습니다. 육식 자체를 반대하는 입장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류독감의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 A4용지 한 장 크기 닭장 사육이나 질 좋은 푸아그라를 얻기 위해 거위에게 과량의 음식물을 주입하는 따위의 행동에 반대하는 정도의 정치적 입장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이런 절충적 입장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이들도 있겠지만 적어도 한국을 놓고 봤을 때 동물실험과 식육동물의 사육법 등에 대해 이렇게 의견을 내주고 관심을 환기시키는 작품이 있다는 자체가 반가운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옥자와 마당의 닭들은 무슨 차이인가' 묻는 관객의 반응도 '역시 한국은 동물권에 대한 이해가 현저히 부족하구나'하며 좌절할 일 만은 아니라고 생각되네요. 그런 질문 자체가 생산적인 토론의 시작이니까요.
미완의 영화
좋은 영화입니다. 메시지는 강렬하고 속도감은 엄청나며 무엇보다 재미있어요. 본격적으로 내달리기 전 옥자와 미자가 우정을 나누는 장면은 반려동물 인구에겐 더 각별했을 거고요. 모두가 아는 배우 제이크 질렌할부터 아무도 몰랐던 신인 배우 안서현이 공연하고 가슴 따뜻한 '동물 영화'가 됐다가 여주인공이 피칠갑을 하는 등 작품 내 장르 이동의 폭도 대단히 큰데, 이는 영화를 쪼개서 보는 넷플릭스 관객들도 한 호흡으로 감상할 수 있는 영화라는 의미도 됩니다.
하지만 <옥자>는 미완의 영화이기도 합니다. 작품 내적, 외적으로 다 그렇습니다. 멀티플렉스 개봉이 좌절된 지금, '이것은 영화인가'라는 아주 근본적인 질문이 작품 외적 질문이 되겠고, 동물권에 대한 마무리되지 않은 토론은 작품이 작품 자체가 던지는 질문이라 할 수 있겠죠. 저도 저 나름의 의견은 있습니다만,지금은 그것을 주장하는 대신 답변의 기회를 여러분들께 돌려드리겠습니다. 옥자와 미란도, 그리고 AFL…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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