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_이야기(24)] 격변하는 동아시아 : 일본의 급부상
김혜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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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27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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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이 역사적 무대로 등장한 시기는 1852년입니다. 일본은 1854년 미일 화친조약부터 1869년 메이지유신까지 이 시기를 전후로 급진적인 변화를 겪게 됩니다.
당시 일본은 에도막부 체제였습니다. 에도막부체제란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후 세워진 무신 정권입니다. 어느 세력이건 간에 말기가 다가오면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지지요. 일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심한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어죽기 시작했지요. 가뭄과 함께 찾아온 전염병은 백성들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습니다.
게다가 18세기부터 드러난 막부체제의 모순은 18세기 말에 점점 더 심해집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막부정부에서는 다양한 개혁정책을 내놓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가지요. 무능한 막부정부의 모습을 본 일본 백성들은 농민 봉기를 일으키기 시작합니다. 막부체제는 더 심하게 요동치죠.
▲ 1854년 3월 8일 요코하마에 내항한 흑선의 모습(E. Brown, Jr., 1855-1856). 일본의 개항은 미국의 페리호에 의해 이루어졌다. 일본에서는 이를 흑선이라고 불렀다.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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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외교 상황은 어땠을까요 일본 역시 쇄국 정책을 주창합니다. 서양에서 무역을 핑계로 일본의 문을 두드립니다. 그러나 일본은 문을 닫아놓고 해안을 더욱 철저하게 방어했습니다. 앞서서 1840년에 일어난 아편전쟁과 청의 패배는 조선과 일본에 큰 충격을 안겨주죠. 그 뒤로 일본과 조선 모두 쇄국 정책을 지향합니다.
일본의 개항은 1854년 미국에 의해 시작됩니다. 미국 페리제독이 일본에게 교역을 요구하며 문을 두드리죠. 처음 일본 막부정부는 개항을 거부하고 미국을 설득해서 돌려보냅니다. 이후 1854년에 미국은 다시 일본을 찾아오죠. 결국 일본은 미국과 미일화친조약을 맺으며 개항을 시작합니다. 여기서 중국과 일본의 태도는 확연히 나뉩니다. 중국은 자신의 사상을 고집하며 서양세력에 반하는 운동을 펼친 것과 달리 일본은 유럽과 미국에 사절단을 보내 그들의 선진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죠.
▲ 이토 히로부미 모습. 에도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에 활동한 정치가이다. 일본의 근대화와 산업화에 앞정선 인물이다. 일본 내에서는 일본 근대를 구축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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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1860년대에 미국에 사절단을 파견하고 1862년과 63년에 각각 제 1차, 제 2차 유럽 사절단을 파견합니다. 이때 일본은 적극적으로 서양을 모방하는 정책을 추구하지요. 이때 서양의 우수한 제도, 정신, 기술을 모두 수용한 일본은 빠른 성장을 이룩합니다. 이당시 등장한 사상으로 정한론이 있습니다. 정한론이란 일본이 서구열강의 압박에서 벗어나 성장하기 위해서는 조선, 만주와 중국을 정복해야한다는 주장입니다. 이는 후에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는데 기반이 되는 사상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서양의 문물을 학습하며 성장한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을 일으킵니다. 메이지 유신이란 일본이 막부체제를 무너뜨리고 천황을 중심으로 한 정치체제를 이룩한 사건입니다. 이후 일본은 기존의 체제를 모두 바꾸며 빠른 근대화를 이루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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