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_이야기(30)] 무리한 경복궁 중건과 흥선대원군의 몰락
- 송군호 선생님께 듣는 경복궁 중건 이야기(7)
김혜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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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3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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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군호 선생님: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을 한 목적은 바로 왕권강화입니다. 국민의 국력을 재정비하고 관리를 결집시켜서 강력한 중앙집권체계를 완성하는 것이었죠. 봉건제에서 벗어나지 못한 지배체제주의 개혁이었습니다.
만약 철저한 민생안정 정책을 유지했다면 백성들의 적극적 호응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자기권력 유지에 빠져있던 흥선대원군은 이후 민생안정보다는 왕권강화에 치우친 정책을 내세웁니다. 철저하게 민생안정을 실시했으면 백성들의 적극적 호응이 있었을 거예요. 그러나 자기 권력유지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민심을 잃을 수밖에 없었죠.
해설: 흥선대원군은 정책 초기에 민생안정을 위한 다양한 정책을 전개했다. 앞선 글들에도 언급한 것처럼, 백성의 고름을 짜던 삼정의 문란을 해결하기 위해 세금을 대폭 낮췄다. 세원확보를 위해 서원을 철폐하고 세도정치에서 벗어나 인재를 등용하는데 힘썼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민생안정보다는 왕권을 강화하는데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백성의 지지는 오래가지 않았다.
▲ 1873년 향원지 북쪽에 지어진 건청궁의 모습. 벽돌조로 지어진 서재 관문각이 보인다. ⓒ경복궁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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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군호선생님: 이후 고종은 왕좌에 오른 지 7년이 넘었지만 아버지의 계속된 섭정으로 자신이 통치를 못하자 아버지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해 건천궁을 짓습니다. 건천궁은 양반집을 모방한 건축물로 현재 경복궁 내부에 있습니다.
당시 국가 재정이 불안정한 상황이었지만 흥선대원군의 허가 없이 고종의 강행으로 공사가 이루어지지요. 고종이 이 건물을 세운 이유는 아버지의 영향에서 벗어나겠다는 의미와 자신이 조선의 진짜 왕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내세웁니다.
해설: 1873년 고종은 친정을 선언한다. 건청궁은 흥선대원군의 그늘에서 벗어나 정치적인 독립을 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공간으로 알려져 있다. 1886년의 기록에는 고종이 이곳에서 정무를 보기도 했다고 전한다. 고종의 정치적 독립과 사라진 백성의 민심은 흥선대원군의 힘을 약화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송군호선생님: 경복궁 중건은 사실 오늘날 시각에서는 긍정적인 측면으로 보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외세의 침략을 막기 위해 일시적으로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모았다는 점을 긍정적이라고 볼 수도 있지요.
그러나 오늘날의 돈으로 환산해 국가 예산이 7,000억 넘게 소비되었는데 꼭 중건을 했어야 하는가를 고려해봐야 하죠. 당시의 국가 재정이 튼튼한 상황도 아니었기 때문에 공사를 하면서도 재정적인 부담이나 압박감을 심하게 느꼈겠죠. 부족한 자금을 양반에게 기부 받고 당백전의 주조차익으로 메꾸어 공사를 마무리했습니다.
해설: 경복궁 중건은 무너진 조선왕조의 기강을 바로세우고 왕권을 강화하겠다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있다. 임진왜란이후 방치되어 있던 궁궐을 재공사하려는 노력은 효명세자, 헌종대에도 계속 있었으나 실제로 시행되지는 못했다. 흥선대원군은 이를 공사로 옮긴 인물이다.
그러나 경복궁 중건은 조선왕조의 경제적 파탄을 가져다주었으며 흥선대원군이 힘을 잃는 원인을 제공한다.
송군호 선생님: 경복궁 중건 초기에는 경상북도 봉화의 춘양에서 나무를 조달했습니다. 그 곳에서 궁궐이나 국가의 큰 공사가 있을 때 쓸 나무들을 관리해서 사용했지요. 그런데 경복궁 중건과정에서 여러 번 화재가 발생하면서 봉화 춘양의 나무만으로는 부족했죠.
부족한 나무를 충당하기 위해서 양반들의 묘지 주변에 심어둔 나무까지 베어 사용합니다. 양반들이 묘지 주변의 나무들을 화초 키우듯 열과 성을 다해 기르기 때문에 나무의 질이 매우 좋기 때문이죠. 양반들은 이에 분노하며 집단 농성을 벌입니다. 그러나 이마저도 부족한 나무의 수요를 채울 수 없자 각 마을 입구에 있는 나무를 베어 이용합니다.
해설: 흥선대원군의 벌목 이야기는 고종실록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흥선대원군이 “지금까지 벌목한 나무는 국유림에서 가져온 것이니 지금부터는 산 주인과 묘주인의 허락과 상관없이 사유림에서 벌목하도록 하라”고 공표한 기록이 남아있다. 강원도 함경도의 나무는 뗏목으로 운반해 왔으며 서낭당의 큰 돌이나 나무도 공출했다. 이는 조선 모든 백성의 공분을 사게 된다.
▲ 금강소나무. 황장목, 춘양목으로 불리며 소나무 중 최상급으로 꼽힌다. 경복궁 중건에 쓰인 나무로, 화재 등으로 나무가 손실되자 양반의 묘에자라는 나무까지 동원해서 공사를 진행했다. 이는 백성들의 공분을 사는 계기를 만든다.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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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군호선생님: 중건 초기 20일 사이에 3만 5천명의 인력이 동원되었습니다. 그러나 강한 노동 강도에 사람들이 지치고 쓰러지면서 인력이 부족하게 됩니다. 정부 관리는 백성들의 불만 섞인 목소리를 듣고 경복궁 중건을 중단하자고 요청합니다. 흥선대원군은 상소가 빗발치는 상황에서도 중건을 강행했고 끝내 성공하죠. 끊임없는 화마와 싸우며 경복궁이 완성되었으나, 조선의 국력은 크게 약화되고 흥선대원군은 정계에서 떠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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