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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읽기(11)] “전쟁, 그건 끊임없는 장례식”

노벨문학상 그대로 읽기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않았다> ②편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2015년 수상자)

조연호 전문위원 승인 2020.05.15 11:00 | 최종 수정 2020.05.27 10:30 의견 0

죽는다. 그리고 또 죽는다. 지금도 죽고 몇 분 후에도 죽는다. 역사는 전쟁의 이유를 여러 가지로 설명해 준다. 주로 인간의 욕망이다. 권력자들의 탐욕이 근본적인 원인이다. 영토를 넓히고 더 잘 먹고, 잘살기 위한 몸부림이다. 혹은 힘의 과시다. 히틀러는 그 힘을 전 세계에 떨치고 싶었다. 전쟁 전에 열렸던 베를린 올림픽에서 독일은 불법적으로 우승한다. 공정한 게임은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현재 올림픽도 개최국 어드벤티지가 있다. ‘공정’, ‘정의’를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올림픽에서조차 편법이 존재한다.

그러나 전쟁에는 규칙이 없다. 그냥 죽이면 된다. 그래서 살아남으면 된다. 하지만, 작가는 여성의 감성이 쉽게 그런 규칙을 따르지 못했다고 전한다.

“여자들은 무슨 말을 해도, 심지어 죽음을 언급할 때조차도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는 결코 빠뜨리는 법이 없다는 것을(정말이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않았다> 중

죽음의 아수라장(전쟁) 속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싶어하는 여성의 본성? 군대에서는 남성과 여성이 존재하지 않고 오직 ‘군인’만 존재한다고만 군 생활 내내 들었다. 그래서 이해하기 힘들다. 아름다움을 따지는 여성이 전쟁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여성들은 실제 전투에서 남성보다 더 초인적인 힘을 보여주기도 한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열정이 다른 힘으로 발휘되는 것일까?

굳이 여성에 초점을 맞추지 않더라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아름다움’이 여성의 표현이라면, ‘용기’, ‘전우애’ 등은 남성적 표현인가? 남성도 아름다움을 원하기에 전쟁 중 사랑에 빠질 수 있다.

◇목적 없는 전쟁

여성의 눈에 전쟁의 목적은 없다. 승리를 기뻐할 수 있지만, 잠시뿐이다. 작가의 역사 속에서 여성은 주인공이자 파편에 불과하다. 그 사실이 눈물로 묘사된다. 왜 여성들은 전쟁에 참여했을까? 작가는 신념을 가지고 온다.

“사람들이 모성본능이 가장 강하다고들 하잖아. 아니, 이념이 더 강해! 신념이 더 강하지! 내 생각엔 그래…… 만약 그런 엄마들이 없고 그런 아이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승리하지 못했을 거라고 확신해.”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않았다> 중

신념은 무섭다. 신념으로 인간은 인간을 죽일 수 있는 명분을 얻을 수 있다.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정당성을 챙긴다. 여성이 참여할 수 있는 명분, 그리고 남성보다 더 열정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원동력이다. 신념이나 신앙은 사실이 중요하지 않다. 이미 머릿속에 세뇌된 신념 따위가 최상위의 가치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념도 여성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오히려 신념으로 가득한 인간은 역사적으로 남성이 더 많지 않던가? 적어도 주인공이라고 할 만한 사람은 남성이 더 많다.

◇작가는 틀렸다

여성의 관점, 여성, 영웅이 아니라 인간을 중심으로 한 작가의 작품 구성은 탁월하다. 그리고 전쟁을 새로운 시각으로 마치, 마주 보는 것처럼 해줬다. 빗발치는 총과 포탄 속, 잔혹한 전쟁의 잔재, 회복되지 못한 감정들. 영화 속에 그려진 잔혹함은 주로 남성의 이야기며, 편집된 위대한 역사의 흔적일 뿐이다.

작가는 이러한 통념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도록 독자를 도와준다. 전쟁에 주인공은 없으며, 오직 인간만이 – 상처받은 인간 –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작가는 스스로 전쟁과 여성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편견을 가지고 글을 썼다. 그렇다면 역으로 전쟁이 남성 – 인간의 반을 차지하는 – 과는 어울릴까?

작가는 틀렸다. ‘전쟁은 남자의 얼굴도 하지않았다.’

“내겐 전쟁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이 많은 반면, 집사람에겐 전쟁에 대한 감정이 더 많아요.”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않았다> 중

작가는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려 한다. 그러나 가능한 일일까? 죽음 앞에서 인간은 연약하다. 혹은 감정이 폭발해서 잔인성을 극대화할 때 강해 보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인간이 그렇다. 여기서 확률은 의미가 없다. 남성의 몇 퍼센트, 여성의 몇 퍼센트를 나누는 건 의미가 없다. 단지, 죽음 앞에서 반응일 뿐이다.

전쟁은 죽음 앞에서 인간일 뿐이지, 여성과 남성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는 편집의 기술을 살렸다. 그녀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적고 그러고 싶지 않은 이야기는 삭제했다. 물론, 변명한다.

“길은 오로지 하나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사랑으로 사람을 이해하는 것.”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않았다> 중

작가 스스로 인정한다. 전쟁은 사람의 얼굴을 하지 않았음을. 인간은 전쟁이 아니라 사랑을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걸 말한다. 사랑은 인간–여성과 남성 모두–가 할 수 있지 특정한 성별(性別)의 인간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그 사람을 여성으로 한정 지었다. 그리고 또 다른 변명을 한다.

“광학에는 ‘집광력’이라는 개념이 있다. 피사체를 잡아내는 렌즈의 정확도를 말한다. 전쟁에 대한 여자의 기억은 감정의 긴장도나 고통의 지수로 볼 때 그 집광력이 가장 높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않았다> 중

‘집광력’은 과학이지만, 작가의 서술은 편견이다. 여자의 기억을 남자와는 다른 ‘집광력’으로 선정한 게 작가의 편견이다. 전쟁은 평균과 확률이 중요하지 않다. 오직 산 사람의 기억일 뿐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남성과 여성을 모두 포함한다. ‘집광력’은 여성이 높은 게 아니다. 사람마다 다르다. 아무리 힘든 상황을 경험한 사람이라도 충격을 쉽게 이겨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

작가는 여성을 연약한 존재, 감성적인 존재, 때로는(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한 존재로 역할을 바꿔가면서 등장시킨다. 인류의 절반이 여성이 아니라 전체가 여성인 듯하다. 역사를 새롭게 썼다고 했지만, 역사는 어느새 문학이 되고 사실은 허구처럼 보인다. 사실을 받아들이기보다 아련한 아픔에 가슴을 쓸어내리게 한다.

작가의 편견은 틀렸다. 그러나 그 편견으로 작품은 더 강하고 아련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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