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손잡이 여인이 등장한다. 그녀는 아이와 함께 산다. 전 남편과도 종종 교류가 있고, 출판사 사장과도 보통 사이는 아닌 듯하다. 남자가 추근대는 수준이라고 보면 될 거 같다. 배우로서는 거의 은퇴한 아버지와도 교류한다. 소설은 여자 주인공을 빼고는 거의 남자들이다.
작가도 남자다. “남자가 여자의 심정을 얼마나 제대로 이해하고 설정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소설은 담담하다. 극적인 반전 같은 게 없다. ‘기승전결’을 기대했다면, 절정을 기대하다가 실망하게 된다. 물론, 무리해서 따져보면 절정을 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배운 소설의 단계는 아니다. 한 마디로 재미없다.
“왼손잡이”라는 표현이 주는 이질적인 느낌이 소설 전체를 덮고 있다. 왼손잡이 여인이라는 표현이 몇 번이나 나오는지도 모르겠다. 작가 자체가 남자인데, 여자가 주인공이고 다른 성별의 심정을 표현해야 하니 소설의 대가라 하더라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솔직히 소설 자체가 자연스럽지 않다(혹은 번역 문제일 수도 있다). 이런 필자의 견해를 편견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작가의 상상력 속에서 여주인공이 잘 묘사된 거라고...”
웃기지 마라! 작가는 여자를 잘 모른다. 그래서 주인공에 대한 묘사가 별로 없다. 그냥 싱글이 된 여인의 복잡한 심경만 드러날 뿐이다. 다른 등장인물들에 대한 묘사는 더 없다. 간단히 언급되는 소개를 보고, 인물을 파악해야 한다. 장편이지만, 비교적 짧은 소설이다. 읽고 있으면, 어느덧 마지막 장을 읽고 있다. 교훈은 없다. 원래 소설은 작가의 시각으로 본 세상이지, 촌스러운 교훈을 던지지 않는 게 낫다.
페터 한트케, 왼손잡이 여인 (사진출처: 예스24)
노벨문학상 수상작품은 사회적 비판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그런 비판도 없다. 작가의 모든 작품이 그렇지 않다는 건 앞글에서 지적한 바 있다. 자, 여기에 작가가 에둘러서 비판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즉, 작가는 사회나 시대를 비판한 작품들을 비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문학의 허구성을 통한 사회 비판은 여전히 허구일 뿐이다. 그리고 예술 속에 담긴 비판은 독자의 해석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서 작가의 비판 의식과 의도가 전혀 반영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한트케는 “이게 바로 문학이야!”라고 선포한 건 아닐까?
필자가 봤을 때 왼손잡이 여인의 삶은 상당히 따분했다. 그러나 주인공은 소설 속에서 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어디 하나 제대로 의지할 데가 없다. 아버지도 그렇고, 하나 있는 아들놈은 성숙해 보이기도 하나, 종종 사고를 친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적극적으로 해결해 주는 슈퍼맨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리얼한 세상을 적나라하게 스케치하고 있다.
아울러 주인공도 원더우먼이 아니다. 남자들이 봤을 때는 매력있는(?) 여자일 뿐이다. 아니면, 임자 없는 쉬운 여자일 수도 있다. 작가는 여주인공이 스스로 서는 모습을 그려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잘 드러나지 않는다. 주인공이 뭘 극복하는 걸까 의문이 들 정도다. 그저 주인공은 그저 삶이 피곤할 뿐이다.
◇이런 소설을 왜 읽을까?
이 소설은 노벨문학상 수상작품이다. 대중은 페터 한트케를 잘 모른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필자도 한트케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후에야 작가의 작품을 읽기 시작했다. 그의 작품을 한 권이라도 접한 독자가 얼마나 될까? 1년에 책 한 권도 읽지 않는 사람이 즐비한 데, 대한민국에서 ‘페터 한트케’라는 이름은 낯선 수준이 아니라, 생시초문일 것이다. 그중에서 “왼손잡이 여인”은 대표작도 아니다. 그러니 읽은 사람은 더 드물 것이다.
작가도 소설을 쓰고 나서 이런 부분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소설의 마침표를 찍으면서 ‘재미없다.’라고 생각했으리라. 그런데, 그게 바로 작가가 생각한 인생일 수 있다. 교훈은 없다. 그냥 주어진 환경에서 묵묵히 살아가는 게 바로 현대인이다. ‘나는 가만히 있어도 주변에서 나를 가만두지 않는다. 나는 사고 치지 않아도 누군가가 사고 친다. 누구도 내일을 대신해 주지 않고, 그런 걸 기대하지도 않는다.’
교훈을 주는 소설은 공동체를 강조한다. 현실 속에서도 공동체를 강요한다. 하지만, 그런 유토피아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유토피아란 뜻이 원래 어디에도 없는 곳이라는 뜻 아닌가?
페터 한트케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그런 의미에서 누구나 ‘왼손잡이’다. 주류가 아니니까
소설은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다. 그러나 작가는 역설적으로 표현했다. 그가 느끼는 현실은 “나는 주류가 아니다!”라고 했는지 모르지만, 그는 이미 주류다. 적어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순간부터는 주류다. 강연비가 올라가고 그의 소설 판매로 인한 인세도 큰 폭으로 올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작가는 스스로 비주류임을 포기하지 않을 것 같다. 왜냐하면, “왼손잡이”를 포기하는 순간 그의 허구는 현실이 된다. 주류가 비주류 소설을 쓸 수 있을까? 주류라 하더라도 비주류 감성이 있다면, 비주류 소설을 쓸 수 있다. 철저히 메소드 연기(Method acting)를 하면 되니까. 그런 의미에서 작가는 확실히 허구를 스케치하기 위해서 현실 속에서 허구로 살고 있다고 느껴진다. “역시는 역시다!”
◇또 다른 읽기
조금 더 확장해서 읽는다면, 작가는 무한한 시공간 속에서 절대 주류가 될 수 없는 인간을 스케치 한 건지도 모른다. 여기서 스케치라 표현한 건 소설 본문 속에서 묘사라고 느낄 수 있는 부분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비주류’는 겸손함의 다른 표현이다. 자신의 인생조차도 어쩔 수 없는 나약한 인간, 그러나 그 상황을 늘 이겨내면서 스스로 일어서는 인간. 시지프스의 바위가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의 인생을 ‘저주’라고 생각하면 자학 아닐까? 아니면, 그의 작품에서 기독교는 등장하지 않지만, 성경에서 인간은 축복을 저주로 바꾼 능력자(역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아름다운 에덴에서 추방되고 싶어 노력했으니 능력을 보여주고 싶었던 아닐까?)였으니 스스로 선택한 고난과 비주류는 겸손이 아니라 자유의지라는 함성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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