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이 소설의 제목이다. 당연히 책을 읽기 전부터 ‘뭐가 반복될까?’, 혹은 ‘반복의 의미가 뭘까?’를 생각하게 된다. 어쩔 수 없이 제목을 의식하게 된다.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하는데, 자전적이란 말은 팩트라는 것이며, 소설이란 말은 허구라는 소리다. 사실과 허구가 결합한 작품이라고 하니 등장인물, 사건, 배경 등은 팩트지만, 풍경묘사, 사사로운 사건, 감정 등은 허구일 가능성이 있다. 사실을 바탕으로 한 허구라고 생각하고 읽어야 한다.
◇계속 반복되는 정류장
소설 <반복>에는 ‘정류장’이 가장 많이 등장한다. 작가 또한 학창 시절 내내 교통수단을 이용해서 등하교했기에 정류장은 피할 수 없는 배경이다. 여행을 가더라도 정류장을 거쳐야 하고, 머무르든 떠나든 정류장은 피할 수 없는 과정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정류장에 몰입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목적지 중심으로 인생을 살아가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설 전반적으로 작가는 내향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페터 한트케, 반복 (사진출처: 예스24)
그의 언어는 독특하고, 세심하다. 그러나 아름답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감동을 주는 언어도 아니다. 이유는 내성적인 어린 시절에 있는 듯하다. 작가는 어머니, 아버지, 형, 누나 가족들을 묘사하는데, 절제미를 보여준다. 차갑지도 않지만, 따뜻하지도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소설은 배경은 계속 바뀌지만, 가족 이야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의 여행은 형의 기록을 더듬는 작업이었고, 여행의 끝은 늘 가족의 품이다. 정처 없이 떠도는 것 같지만, 이 역시 반복이고 그가 돌아갈 곳이 있다는 점도 반복이다. 정착과 목적지가 아니라 ‘정류장’이 반복되고 있다.
◇이해하기 힘든 작가의 언어
사실, 작가의 언어는 이해하기 힘들다. 소설 속 지명조차도 글자 그대로 읽기 힘들다. 낯설다. 아울러 작가가 그만의 시공간에서 살면서 느낀 언어를 온전히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 따라서 필자의 글은 ‘그대로 읽기’를 지속하며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한 독자의 시각으로 작가의 언어를 이해하고 새로운 글로 담아보는 과정으로 보면 되겠다.
작가는 삶의 일부분을 소설로 정리하면서 그만의 오감(五感)의 언어로 주변을 그린다. 어떤 부분은 거칠고, 어떤 부분은 굉장히 섬세하다. 대체로 섬세한 묘사여서 소설을 스킵해서 읽는다면, 줄거리는 알 수 있을지 몰라도 소설의 참맛은 느끼지 못할 것이다. 필자조차도 번역을 통해서 작가의 언어를 훑었기에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역시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작품이다. 섬세한 언어에는 세상을 부정적으로 인식하지는 않지만, 냉소적인 시각이 새겨져 있다. 전체적인 느낌은 밝지 않다. 아름답지도 않다. 선명한 묘사가 있으나, 독자는 묘사된 것들을 쉽게 떠올리기가 어렵다. ‘냉소’라는 섬세한 가이드를 뽑아 독자를 안내하라고 지시한 것만 같다.
◇한트케 소설의 공통점
한트케의 여러 작품을 읽으면서 알게 된 공통점이 있다. 그에게는 명확한 주제 따위는 없다. 결말도 우리가 기대하는 ‘해결’이 아니다. 그저 과정으로 끝난다. ‘반복’이다. 그의 작품은 ‘반복’을 상징한다. 기승전결이 아니라 그냥 “전(轉)”만 존재하는 거 같다. 시작도 없으며 갈등도 보이지 않는다. 공식에 맞춰서 억지 퍼즐을 맞추려고 한다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같은 폭력적인 작업을 해야 할 것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작품은 좀처럼 교훈을 전하려 하지 않는다. 물론, 문학의 목적 자체가 교훈 전달은 아니다. 독자는 작가의 시선으로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으면 족하다. 더 바랄 게 없다. 그리고 여기에 독자가 보는 세상을 덮어씌우면 된다.
당연히 작가의 ‘반복’은 독자의 반복과 다르다. 독자는 작가의 시공간과 다른 시공간을 산다. 평행 우주가 아니라, 서로 다른 우주를 살아간다.
◇뭘 읽을 수 있을까?
문학을 감상하기 힘든 이유는 뚜렷한 목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학창 시절에 읽었던 문학은 문제 풀이를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성인이 돼 접하는 문학에는 목적이 없다. 굳이 읽지 않아도 된다. 읽는다고 해서 돈벌이에 유익한 것도 아니고, 더 좋은 직장을 구할 수도 없다. 가끔 입사면접과정에서 유리하게 작용하는 것 빼고는...
그런데도, 문학을 읽으면 좋다고 말한다. 기능적인 차원에서 두뇌 자극을 많이 언급한다. 아이들한테는 논리력 향상을 말하고, 어른한테도 자기계발에 좋다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절대적이지 않다. 노벨문학상 수상작품을 읽는 까닭은 작가의 사회를 보는 상대적 시각을 느껴보기 위함이다.
그들은 주로 비판적이다. 그리고 고정관념을 깬다. “대단한 작가의 작품을 읽으면 많은 걸 깨달을 수 있겠지?”라는 기대 또한 산산조각 내버린다. 한트케는 독자의 기대를 확실히 밟아 버렸다. 읽고 나서 감동조차 느낄 수 없다. “뭐지? 난 뭘 읽은 거지?” 시간 낭비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나와 다른 작가의 시각으로 세상을 본 것으로 만족하자. 한트케의 소설, 그의 문장, 그의 단어, 그의 문체, 그의 시공간. 전부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독자는 작가가 될 수 없다. 그의 자전적 소설도 허구가 가미된 것이니 그도 스스로를 제대로 구성하기 힘들었다.
소설은 전한다. 인생이 그런 것이라고. 뭘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는 것, 그래서 계속 찾게 된다는 것. 그러나 찾을 수 없다는 걸 알기에 허무주의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이 있음을 작가는 에둘러 표현한다.
<반복>은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한 본인의 의지라고 볼 수 있다. 왠지 니체의 영원회귀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차이점은 후자는 ‘위버멘쉬(*Übermensch: 니체가 언급한 ‘초인’. 위버멘쉬는 항상 자기 자신을 극복하는 신체적 존재이며, 인간 자신과 세계를 긍정할 수 있는 존재이자, 지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를 완성시키는 주인의 역할을 하는 존재)’가 최후에 등장하지만, 전자는 반복만 거듭한다. 그나마 한트케의 <반복>이 주는 다행이라면 “가족의 품은 비교적 따뜻했다”는 점이다.
◇애써 한 마디 늘려보자
가족애가 주제는 아니지만, 한트케 소설은 개인의 고독을 씁쓸하게 드러낸다. 개인의 자유를 권하기보다는 ‘함께’를 권한다. 그가 원하는 바람직한 이상향이 ‘가족’과 같은 ‘공동체’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반복>에서 등장한 가족은 언제나 돌아갈 수 있는 ‘정류장’ 같은 곳으로 이해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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