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상상해 보자
이런 실험을 해본 적 있나? 눈을 감거나 안대를 착용하고 집안을 돌아다녀 보는 실험. 앞이 보이지 않으면, 수십 년 살아 온 집이라 하더라도 정상적인 일상생활이 어렵다. 단순히 돌아다니는 것은 물론, 기본적인 의식주 생활 자체가 어렵다. 원래부터 시각장애인이었다면 본능적으로 시각을 대신할 감각을 터득했을 텐데, 갑자기 눈이 멀게 됐다면 한동안 제정신으로 일상을 살아가기 힘들 것이다.
◇모든 시민의 눈이 멀었다
작가의 발상은 충격적이다. 한 도시의 모든 시민의 눈을 멀게 했다. 단, 동시에 모든 시민의 눈이 먼 것은 아니다. 개인마다 시간 차이가 있는데, 그 시간의 차이가 인간의 부류를 나눈다.
첫 번째 부류는 시간 차이를 자신의 이익으로 삼으려는 이기적인 인간형이다. 상점에 들어가서 물건을 훔치고, 성폭력을 휘두르는 등의 악행을 저지른다.
두 번째 부류는 숙명론자이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살아간다. 이들은 자발적으로 악행을 저지르거나 선행을 베풀지도 않는다. 그저 ‘될 대로 되라지.’식이다.
세 번째 부류는 캄캄한 암흑 상황에서도 빛과 같은 역할을 하려고 한다. 어려운 사람을 돕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도 곧 눈이 먼다.
차이가 극복되면 위의 인간 부류는 달라질까? 그렇지 않다. 그러나 각각의 부류의 비율은 달라질 것이다. 아마도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다. 어둠의 공포를 극복할 방법은 다른 감각을 십분 활용하는 방법뿐이지만, 갑자기 눈이 멀었기에 다른 감각이 이미 어둠에 익숙해진 시각장애인처럼 될 수 없다. 이후 권력은 기존 시각장애인들이 쟁취하게 된다. 명예와 부, 권력을 가졌던 자들 대신 이제 이와 전혀 상관없었던 자들이 힘을 갖게 된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다”
성경에 따르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구덩이에 빠진다. 제대로 인도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실제로 현실에서는 소경은 어둠 속에서 길 안내를 잘한다. 속도는 빠르지는 않아도 정상인을 어둠 속에서 안전하게 인도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위와 같은 말을 한 사람은 소경을 잘 모르고 한 소리다. 본인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면서 소경을 무시한 발언이라 할 수 있다. (*주:성경에서는 예수가 위의 말을 했다고 성경기자가 기록하고 있다. 물론 성경에서 소경을 언급한 콘텍스트가 존재하는 것은 이 비유를 통해 어리석은 사람들을 깨우치자는 취지의 다른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
눈먼 도시에서 소경은 권력자이다. 그들은 원하지 않았어도 힘을 갖게 됐다. 그들은 도시를 지배한다. 원하는 음식을 먹을 수 있고, 폭력을 행사할 수도 있다. 성적인 욕망도 마음껏 분출한다. 이들뿐만 아니다.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도덕, 윤리는 유린(蹂躪)된다. 아무도 볼 수 없다는 것은 일탈을 마음껏 조장한다.
◇눈먼 자들의 적은 눈뜬 자일까?
겉으로 보면,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는 그렇게 보일 수 있다. 어둠 속에서 강력한 감각을 발휘하는 소경이라고 하더라도 ‘눈뜬 자’를 이길 수 없다. 소설 속에서도 연약한 여자 주인공 한 명이 탐욕이 가득한 눈먼 권력자들과의 대결에서 밀리지 않는다.
주제 사라마구 저 <눈먼 자들의 도시> (사진출처: 알라딘)
그래서 자칫 잘못 해석하면, “빛은 역시 어둠을 이긴다.”라는 교훈을 애써 찾으려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가가 선보인 마술(*주:실제로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소설기법이다)은 교훈을 주기 위함이 아니다.
‘눈먼 자’, ‘눈뜬 자’의 경계를 무색하게 만든다. 도대체 뭐가 진실일까? ‘눈먼 자’일까? 아니면, ‘눈뜬 자’일까? 달라진 건 힘을 가진 자가 바뀐 것뿐이다. 눈먼 소동으로 도시가 아수라장이 됐지만, 정상적인 도시라고 해서 천국 같을까?
또한, 진실에 대한 의문도 제기한다. 인간의 진실은 보이는 것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 주인공은 남편의 외도현장을 목격한다. 남편은 아내가 지켜볼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본인의 어둠이 다른 사람의 어둠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설사 다시 눈을 뜬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범한 여자가 기억하지 못한다고 판단한다. 보이지 않음은 평범한 사람도 일탈하게 만든다.
또 한 번 성경의 한 장면을 보자. 예수 죽음 이후 천지가 진동하는 것 외에 휘장이 갈라졌다. 신과 인간 사이에 아무것도 없게 된 것이다. 단순히 생각하면 중개자 없는 신과 직접적인 교류로 더 많은 사람이 선하게 살 거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중개자 없는 세상에서 내 죄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오직 신만이 안다. 보이지 않는 신이 알기에 당장 눈치 볼 필요가 없다. 적어도 인간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죄에 대한 해방을 얻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이 세상에서의 자유는 더 많은 죄를 만들 수밖에 없다.
보이는 곳의 평판이 진실일까? 아니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진실이 드러날까? 인간의 탐욕, 폭력, 성욕, 지배욕 등은 언제라도 표출될 수 있다. 이제 ‘눈먼 자’와 ‘눈뜬 자’는 적이 아니라 공존하는 양면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진실은 고정된 게 아니라 상황에 달린 것이다.
◇플라톤의 동굴
플라톤의 <국가>에는 ‘동굴의 우화’가 등장한다. 앞 사람의 뒤통수와 그림자만을 보면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 중 한 명이 우연히 바깥세상을 구경하고 다시 동굴에 들어가서 진실을 말한다. “여기는 세상이 아니다. 진짜 세상은 다르다”라고... 하지만 그는 정신병자로 몰린다. 혹세무민(惑世誣民)을 이유로 추방된다.
‘눈뜬’ 여자 주인공 한 명이 있다. 그녀는 아비규환(阿鼻叫喚)과 같은 현실을 모두 지켜봤다. 진실을 알고 있고, 그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사람이다. 그녀의 시각은 눈먼 권력자들의 두려움이다. 아무리 연약한 여성이지만, 무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혹, 모든 사람이 다시 눈을 뜬다면 그들의 범죄는 이 여성을 통해서 밝혀질 것이다.
소설에서는 다시 밝은 세상이 찾아온다. 모두 눈을 뜬다. 그래서 정상적인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번 겪은 공포는 트라우마로 남는다. 도시는 ‘눈먼’ 상태에서 ‘눈뜬’ 상태로 바뀌었지만, 공포감 해소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단 한 명 ‘눈먼’ 상태를 경험하지 못했던 주인공은 영웅이 아니라,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 더 큰 혼란을 경험할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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