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 성장의 한계 : 소비하는 개인의 등장

조연호 작가의 <한국 교회가 살아야 한국이 산다> (59)

조연호 전문위원 승인 2019.09.11 10:21 의견 0

교회의 철저한 조직관리와 기복신앙에 의지한 성장은 한계에 직면한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도 ‘개인’이 등장한다. 인간이 세상의 주인공이 된 건 성경적으로 볼 때는 선악과 이후가 된다. 그 전까지 인간은 창조된 신과 같았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표현이 모든 걸 말해준다.

철학적으로 신의 자비로운 테두리를 벗어나기 시작한 건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였을 것이다. 인간의 사유마저도 신의 통제하에 있었다는 신본주의는 데카르트 이후 조금 줄어들었다. 조금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는 인간이 점전적으로 신의 테두리에서 벗어날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는데, 어쨌든 인간의 사유를 앞에 내 세운 데카르트 조차도 당시에 는 완전히 신을 부인하지 못했으니 '조금'이라는 표현이 적절하다.

반면에 21세기의 한국 교회는 신성의 거룩한 테두리에 겸허히 놓여있는 상황이다. 조금 복잡한 이야기지만, 신을 바라는 보는 시각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신본주의 신론이다. 즉, 전지전능한 신의 존재를 인정한다. 신은 세상을 창조했고, 그 운행에도 간섭한다는 의미다. 이러한 의미는 현재 한국 개신교 성도 대다수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다. 잘 되든, 그렇지 않든 성도는 하나님 뜻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럴 겨우 내 탓은 존재할 수 없다. 다 하나님 탓이다. 이렇게 생가하면, '자유 의지'는 어디에 존재할 수 있을까?

두 번째, 이신론이다. 세상이 신의 창조물이라는 건 인정하지만, 그 운행에는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로 계몽주의 시대에 등장한 신론이다. 그러나 이때도 신 대신 새로운 우상이 있었는데, “이성”이었다. 사실, 인간의 이성이 신을 대체한 것이어서 인간 자체를 신의 경지로 상승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어쨌든 신적인 존재를 만들어 놔야 마음이 편해지는 동물인가 보다.

세 번째, 무신론이다. 세상은 빅뱅으로 만들어졌으며, 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가 아니라 우연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다. 진화론도 이런 범주에 포함된다. 사실, 대부분의 인간은 모든 게 우연이라고 하면, 인정하기 싫어한다. 원숭이와 조상이 같고 내가 살아가는 모든 과정이 운명이 아니라 우연이라면, 살아야 할 목적이 어디있을까? 그러나 현대 물리학은 여전히 불확정성 원리에 손을 들어주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물론, 이 이론이 바뀔 수도 있다. 비판과 토론 이론의 붕괴가 가능한 것이 과학의 위대한 점이다.

결론은 무엇일까? 개인적인 생각은 이 세 가지가 다 존재하는 세상이다. 필자는 창조론을 믿고,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우주가 운행되고 있음을 믿는다. 그러나 모든 걸 하나님이 정해 놨다고 하는 무책임한 고백에는 동의하기 힘들다. 아울러 진화론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포함된 일부라고 생각한다. 전지전능한 신이라고 믿으면서 명백한 진화론을 거짓이라고 믿으려고 발악하는 일부 개신교인의 무지함을 비판한다.

다시, 개인으로 돌아오자. 인간 개개인의 등장은 오래됐지만, 주체로 활동하는 데는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국가가 등장하고 민족이 탄생하면서 인간은 신에게서 벗어났으나 공동체에 귀속됐다. 국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국민은 여전히 드물고, 우리나라는 민족 이름 앞에서 거룩해진다.

그러나 결국, 인간은 홀로서기에 성공했다. 이제 공동체를 강조하기보다는 개인의 자유가 중요시되고, 조직의 힘보다는 개인의 인권이 중요하게 여겨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조직보다 공동체(말로만 공동체)를 강조했던 교회는 턱없이 무너지게 된다. 예를 들어서 문화 분야에서 교회는 좀처럼 대중문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적응하지 못해서 청소년들을 내어주게 된다.

청소년들이 원하는 건 합창이 아니라 아이돌이었다. 아이돌은 단체를 중요하게 여기는 거 같지만, 따져보면 각기 개성을 통해 팬들한테 선택되기를 기다리는 무지개 속의 한 가지 색일 뿐이다. 이런 상황이 3차 산업혁명의 끝자락에 이르면,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과 같은 SNS가 등장하는데, 교회는 이러한 개인의 소통 도구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대부분 플랫폼이 거대한 조직이 아니라 개인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철저히 소비자를 위한 온라인 인터페이스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잠시 시선을 돌려보자.

SNS가 인간의 자유와 표현을 확대하고 향상한 부분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플랫폼이 만들어진 이유가 일부 창업자들의 수익 창출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물론, 위키피디아 등과 같은 공유 지식의 산물도 있지만, 대체로 영리가 목적이다. 아무리 검색 기능이 좋은 구글이라 하더라도, 구글의 목적은 수익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은 철저히 소비자로 구분돼 분석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