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은 항상 인류에게 행복을 줬을까? 과학은 미신의 어두움에서 벗어나 계몽의 밝은 곳으로 인도해주었다. 이 사실은 인류 발전에 큰 공적이다. 그러나 계몽이 반드시 인간의 행복과 일치한 건 아니다. 진실을 아는 건 중요하지만, 좋은 건 아닐 수도 있고, 행복과는 더 무관할 수도 있다.
그런데도 사회는 투명성을 강조하고 진실을 알려고 한다. 바로 호기심 때문이다. 인간의 호기심은 역사적으로 볼 때도 그리고 신화적으로 볼 때도 장단점이 있었다. 인간의 역사를 볼 때 인간은 진실을 보려고 하기 보다는 본인이 진실이라고 믿고 싶은 걸 받아들이고 싶어 했다. 그렇기 때문에 히틀러와 같은 선동정치가 통할 수 있었고,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왕왕 출현할 수 있었다.
과학기술 분야도 이러한 인간의 법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하나의 이론이 극복되고 새로운 이론이 인정받는 과정 역시 객관적 사실이 우선되기보다는 인간관계, 혹은 권력이 더 중요했다. “패러다임”이라는 언어를 제안해서 지금까지도 활용하게 한 토마스 쿤은 <과학 혁명의 구조>에서 과학의 경향성을 제기하면서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하기까지의 과정이 일순간에 일어나는 일이 아님을 강조했다.
과학기술이 객관적인 사실을 밝히는 하나의 방법론인 건 분명하다. 그리고 기술적인 응용으로 인류의 삶이 더 윤택해졌음도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결과론적으로 볼 때 부인하기 힘든 사실이다. 그러나 그 과정을 지켜보면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치열한 토론과 검증과정과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조앤 베이커의 <일상적이지만 절대적인 양자역학지식 50>은 이와 같은 치열한 부분을 물리학의 역사를 통해 보여준다. 새로운 이론이 기존 이론의 한계를 극복하고 완벽하게 인정받는 과정보다도 기존 이론이 한계에 봉착했음을 인정하기가 더 어려웠다. 과학계에서도 팩트가 중요한 게 아니라 관성과 기존세력의 권력이 더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왜 그럴까? 과학기술을 다루고 사용하는 주체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객관적이기보다 주관적일 때가 더 많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대니얼 카너먼의 <생각에 관한 생각>에서는 인간의 사고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하나는 즉흥적인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이것저것 따져보는 신중한 사고라고 한다. 물론, 대다수 인간의 사고방식은 전자의 성향이며, 이를 편향(bias)이라고 말한다.
과학자 역시 다르지 않다. 그들이 평생 연구한 업적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걸 원치 않고, 그의 결론이 틀렸다는 걸 편안하게 지켜볼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의 소유자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여전히 많은 과학자가 신을 믿는다. 과거보다 더 첨단 과학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신을 믿는 과학자의 비율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진실을 밝히는 실험을 하지만, 기존에 존재한(교육, 가족과의 추억, 학창 시절 등에 의해 형성된) 사고방식을 한순간에 털어 버리긴 불가능하다.
이제 다시 블록체인 거버넌스로 돌아오자. 블록체인에 방점을 찍고 논의를 이어가면, 결론적으로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게 된다. 영화 <터미네이터>처럼 슈퍼 인공지능(ASI: Artificial Super Intelligence)이 지배하는 시대라면 모를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로고스, 에토스, 파토스를 두루 갖춘 인간이 과학기술을 다루는 동안에는 과학기술 사용은 인간이 결정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인간은 그 기술을 활용했을 때 천문학적인 이익을 얻는 자들로 국한된다.
과학기술은 인류의 보편적 복리에 혜택을 준 부분이 분명히 있지만, 그 복리 혜택은 불평하게 이뤄졌다. ‘블록체인’이 평등과 탈중앙, 분권화 등을 지향하지만 이 역시 블록체인을 활성화할 수 있는 국가에만 해당하는 제한된 시나리오다. 물과 같은 자원이 부족해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어가고 있는 국가에서 블록체인은 다른 별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거버넌스에 방점을 찍자는 건 기술을 말하기 전에 사람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거버넌스는 로봇이 아니라 인간이 참여해서 의결하는 협의체이기 때문이다. 물론, 인공지능이 충분히 발전한 후에는 로봇이 참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먼 미래 이야기다. 블록체인에 방점을 찍는 글들은 거버넌스의 주체조차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들만의 리그’를 위한 거버넌스는 가능하지만,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반을 아우를 수 있는 거버넌스는 블록체인으로 구현할 수 없다. 실제로 에스토니아같이 전자 민주주의가 잘 발달한 국가도 회의 과정으로서 전자 민주주의를 구현하기는 힘들다. 편리성과 정확성, 그리고 투명성을 바탕으로 한 의결 과정에 긍정적인 효과를 줄 수 있을 뿐이다.
기술에 우선하면, 인간이 뒤로 처질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기술로 인해서 큰 이익을 얻는 집단만 혜택을 보고, 나머지 인류는 기술에 밀리는 상황이 된다. 대다수 글은 블록체인의 기술에 대한 장밋빛 전망이 대부분이다.
미래를 예측하는 글들은 장단점을 분석하지만, 대체로 낙관적인 경향으로 흐르게 돼 있다. 실제로 발생할 문제점들에 대해서는 크게 언급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부정적인 글은 잘 읽히지 않기 때문이다. 혹, 좋은 글이라 할지라도 권력에 의해 그 전파와 전달이 느려지거나 중간에 차단될 수도 있다. 위에서 지적한 천문학적인 이익을 얻는 자들의 로비로 인해서 블록체인도 그들이 충분히 기득권을 행사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를 때까지 상용화는 제한될 수 있다.
기술은 분명 문명의 이기이자, 인류에게 혜택을 줄 수 있는 프로메테우스의 불이지만, 그 불의 사용 주체가 어떻게 결정하는지에 따라서 달라진다. 블록체인 역시 또 하나의 프로메테우스의 불과 같은 도구일 뿐이고, 이 불을 사용하는 주체는 여전히 사람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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