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6월 6일 현충일 오전 10시에는 전국적으로 1분간 사이렌이 울리고, 모든 사람들은 사이렌 소리에 맞춰 경건한 묵념으로 순국선열들의 넋을 기린다.
그러나 경건해야할 현충일 묵념이건만 경망스럽게 현충일 사이렌을 기다렸던 소년 시절의 추억이 있다. 바로 일본 애니메이션 <지옥의 외인부대>다. 요즘은 원제인 <에어리어88>로 정확하게 불리고 있지만 말이다.
현충일 추념의 대상에는 항일 독립운동을 하셨던 분들도 포함이 되건만, 현충일 사이렌을 들을 때마다 일본의 전쟁 애니메이션을 떠올리게 된 건 내 잘못이 아니다. 이 모든 사단의 원흉은 국민의 시청료로 운영되고 있는 공영방송 KBS일 뿐...
▲ TV시리즈대표 이미지 모음. 원본 링크는 https://web.archive.org/web/20041009151905/http://www.tv-asahi.co.jp/a88/ ⓒ TV아사히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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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이면 소년들에게 전쟁의 참혹함과 호국보훈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고른 만화영화가 왜 <지옥의 외인부대>였단 말인가 게다가 아무런 예고도 하지 않은 채 달랑 신문 한 구석의 <TV 편성표>에 “특선만화 2부작 <지옥의 외인부대>”라고만 내보내어 호국보훈 정신에 불타는 소년들을 TV 앞에 불러 모아 어마어마한 문화충격을 주고만 것인가
당시 그 애니메이션을 봤던 소년들 대부분은 입을 모아 “우연히 TV를 틀었다가 기똥찬 걸 보았다”는 일관된 증언을 남기고 있다. 첫 방영은 1989년 6월 5일 저녁 6시였는데 시작하는 첫 장면에 T-54 전차의 포탑이 등장하자마자 주인공 ‘진’이 조종하는 F-8 크루세이더가 급강하하며 전차부대를 박살내는 2분 가량의 시퀀스에 넋이 나가버린 것이다.
그 즉시 전화통에는 불이 나기 시작했다. 군사정부 하의 새마을정신 교육과 반공교육의 성과는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비상연락망을 즉각적으로 가동한 것이다. “안녕하세요 OO있어요 OO냐 닥치고 9번 틀고 △△에게도 전해라!” 나 혼자만 투철한 상무(尙武)정신으로 무장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럴수록 ‘덕업상권(德業相勸)’으로 혼연일체가 되어야 할 터...
6시에 시작해 7시 40분이라는 100분의 시간 동안 브라운관에 얼마나 집중했던지, 밥 먹으라는 어머니의 불호령이 여러 번 있었으나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만화영화를 보는 중간중간에도 어머니의 잔소리는 끊이지 않았지만, 두 형제의 집중력이 어마어마해 눈에서 광채를 뿜어내다보니 TV전원을 뽑아버리는 극단의 수까지는 쓰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런 정신으로 공부하라는 핀잔 정도로 끝났다.
현충일 사이렌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때 그 일을 기억하게 하는 것은 조금 다른 사연 때문이다. 밥 먹는 것을 잊을 정도로 집중해서 봤던 만화영화의 끝부분은 2부가 있다는 것을 예고했기 때문이다. 신문을 펼쳐 확인해보니 다음 날인 현충일 오전 10시 반에 2부를 한다는 것.
▲ 당시 석간으로 발행되었던 1989년 6월 5일 동아일보 16면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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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즉시 동생과 작전회의에 들어갔다. 오늘 일로 인해 어머니의 심사가 좋지 않으시고, 이에 따라 내일의 본방사수가 어려울 수 있다는 예상이었다. 당시 비디오 플레이어를 가진 집은 거의 없었고, 있다 하더라도 녹화용 테이프가 있어야 하는데 오밤중에 그걸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게다가 이런 특선만화의 경우 재방영은 그 다음 명절 즈음에나 가능할 텐데, 명절 가족나들이 스케줄을 우리 맘대로 할 수도 없다는 추론에 도달했다.
따라서 어떻게 해서든 본방사수를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고, 본방사수를 위한 굳은 결의를 다지며 어머니의 자비심을 구할 수 있는 방도를 찾기 위한 체크리스트 작업에 들어갔다.
소년들의 생각이야 뻔하지 않은가 아침 일찍 일어나서 이부자리 정돈, 청소, 숙제 미리하기 등 어머니를 기분 좋게 할 일들을 하는 것이었다. 즉석에서 시간표를 짠 후 우리는 작전에 돌입했다. 우선 이 밤이 가기 전에 최대한 숙제를 해놓고, 아침 7시에 일어나 각종 집안 일을 분담해 선제적으로 해치우는 것이었다.
작전의 최종단계는 아침 9시 경 자습에 돌입한 후, 10시 정각 현충일 사이렌이 울림과 동시에 묵념과 더불어 KBS의 현충일 기념식 방송을 보러나온 척하며 그대로 엉덩이를 뭉개고 앉아 10시 반부터 방영되는 <지옥의 외인부대> 2부를 100분간 시청한다는 것이었다.
형제는 용감했고, 본방사수는 성공했다. 2부 또한 얼마나 집중해서 봤으면 주인공의 첫 대사 “여기는 제로제로 편대의 진! 12시 방향에 적기 발견!”이라는 대사가 기억나겠는가?
여튼 이런 일로 인해 현충일 사이렌이 울릴 때마다 떠오르는게 바로 이 애니메이션 <지옥의 외인부대>다.
당최 KBS가 이걸 방영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혹여 방송국 내부에 토착왜구가 있었다는 식의 말은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당시 88올림픽을 거치며 전국민의 문화적인 욕구가 증대했고 눈높이 또한 많이 높아졌다. 현충일마다 틀어주던 김청기 감독의 <똘이장군> 시리즈들은 작화의 질이나 스토리 라인에 있어서 설득력이 떨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 제작된 지 10년 지난 <똘이장군> 시리즈는 작화의 퀄리티나 스토리 면에서 이미 시대에 뒤떨어지는 콘텐츠였다. 석기시대에서 온 듯한 소년이 기관총을 이긴다는 정신승리도 설득력을 잃고 있었다. ⓒ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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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는 중동전쟁이나 이란-이라크전을 거치며 현대전에 대한 실제감을 주면서, 작중 ‘아슬란왕국’의 동란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여전히 겪고 있는 상황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데 적절했을 것이다.
(실제로 방영 그 다음 해인 1990년 8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을 통해 중동에서 또 한 번 전쟁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1991년 1월 <사막의 폭풍>작전을 시작으로 걸프전이 본격화되자, <지옥의 외인부대>에 등장하던 전투기와 전차들이 불을 뿜는 장면을 CNN 중계를 통해 목격하게 된다.)
이런 까닭에 군국주의의 전범 일본이 만든 전쟁 애니메이션임에도 현충일 특집으로 방영하는 데 적합하다고 보고 슬그머니 편성한 것은 아닐까?
(하지만 필자는 방송국 담당자 중 ‘덕심’ 가득한 자가 있어 ‘10만 덕후 양병’을 위한 의도적 공작을 겸했던 것이라는 그럴듯한 망상을 갖고 있다. 근거는 아래에서 밝히도록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예고가 없던 상황 속에서 수많은 소년들의 추억이 된 데에는 제목의 힘이 컸다는 추측을 해본다. 우선 당시 청소년들 사이에서 최고의 히트만화였던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과 조어상 유사점이 있었다.
게다가 호국보훈의 달이면 ‘주말의영화’ 등의 프로그램에 편성되던 전쟁영화들과도 비슷하게 여겨진다. 50명의 용병대가 아프리카에서 작전을 펼친다는 내용의 <지옥의 특전대>(원제 ‘The Wild Geese’), 1차 세계대전 당시 아라비아 사막을 배경으로 프랑스 외인부대가 주역으로 등장했던 <최후의 외인부대>(원제: ‘March or Die’)와도 제목과 배경 등이 유사하다.
따라서 <지옥의 외인부대>라는 제목 하나만으로도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기대감과 친근감을 주었던 것은 아닐까?
(필자는 이런 조어방식을 단서로 이 작품을 편성한 당시의 KBS 담당자가 단순 덕후의 수준을 넘는 '오덕군자'로서 군자의 길을 개척했던 선각자였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여튼 <지옥의 외인부대>의 여파는 상당했다. 6월 7일 아침 등교와 동시에 각 반 교실은 50여명의 학생들이 동시에 쏟아내는 공중전투신의 이야기로 난리가 아니었다. 만화영화를 보지 못한 친구들에게 줄거리와 인물소개, 인물 간 갈등구조를 전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그림에 재주가 있는 친구들이 등장인물이나 명장면들을 재현하는 삽화를 그려냈고, 떠벌리기를 좋아하는 친구들을 통해서는 군대갔다온 삼촌이나 형들에게 들었다는 출처불명의 말도 안 되는 군사지식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지옥의 외인부대>의 여파는 이뿐이 아니었다.주인공 ‘진’이 전선으로 출격하며 끝나는 엔딩신의 미완결 구조가 또 다른 상상을 자극한 것이다. 방영 수일이 지난 후 일본 애니메이션에 일가견(一家見)이 있어 3부를 먼저 봤다고 주장하는 일부 양치기 소년들이 지금으로 따지면 일종의 ‘팬픽’에 해당하는 입담을 쏟아냈다.
종합하자면 이렇다. <지옥의 외인부대>를 통해 다양한 분야의 덕후가 양산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기존에는 청소년들 중에 ‘만화광’, ‘영화광’ 정도만 있었던 수준에서 이를 더 확대하고 세분한 덕질이 시작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슬기로운 덕후생활>이라는 코너를 열어 본다. 연재는 비정기적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다음 회에서는 오늘 못다한 <지옥의 외인부대>와 관련된, 꼬리에 꼬리를 무는 덕질을 시전해 보려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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