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는 독일 통일(51)] 베를린 협정, 미국에게 지지받다
칼럼니스트 취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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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3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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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에곤 바르는 미국 케네디 대통령의 평화정책을 언급하고 있다. 바르는 강연에서 미국의 평화전략을 언급하고 있다. 에곤 바르의 강연이 있기 불과 3주일 전 6월 26일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베를린 명예시민증을 받은 베를린 자유대학 학생들과 교수들 앞에서 연설을 했다.
이제 베를린 시민과 독일 정치인은 현실에 주목해야 한다는 취지의 연설이었다. 그는 가정이나 소망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동서 베를린과 동서독의 평화적 재통일은 급속히 이루어지지도 않을 것이고 쉽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는 상대가 자신의 진정한 이익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 더 잘 이해하고 알 수 있도록 하는 방향으로 인도해 나가야 할 것이다.
장기적으로 서방의 강한 힘(Stärke)이 현 상황, 즉 철조망으로 조성된 인위적인 경계에 개의치 않고 독일인들의 자유로운 상호왕래가 가능하게 돼 독일민족과 독일국민이 명실공히 하나가 되는 상태가 반드시 관철되고 말 것이라는 것이었다. 베를린 통행협정은 이런 노선의 확인이었고 케네디의 평화전략에 대한 화답이기도 하였던 셈이다.
당시 브란트는 장벽 통과를 가능하게 한 이런 최초의 ‘작은 걸음’을 통해서 미국 정부의 지지를 받았다. 미국 정부는 일반적으로 서독에게 더 유연할 것을 조언하였다. 반면에 루트비히 에어하르트 총리와 기민련/기사연 측은 이런 시험적인 ‘동독 탈(脫)고립화’ 노력에 회의적으로 대응하였다. 이들은 앞으로 동독 정부에 더 많은 양보를 우려했기 때문이다.
재정 정책을 둘러싼 자민당과의 불화로 기민련/기사연-자민당 연정이 붕괴하면서 사민당의 정부 참여 길이 열렸다. 고데스베르크 강령 채택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청산하고 미국의 평화정책에 호응하는 브란트를 당수로 하는 사민당의 연정 참여는 문제가 없었다. 당내에 일부 반대가 있었고 당 밖의 비판적 지식인의 반대가 거셌지만, 연정 협상을 주도한 베너 등은 연정 참여가 사민당 단독 집권으로 가기 위한 안전한 과정으로 보았다.
참고로 당시 반대는 이런 대연정에 대하여 “이게 무슨 민주주의냐”라는 것이었다. 연방하원 재적의원 518명 중 468명이 여당이고 50석의 자민당만이 야당인 의회에서 어떤 민주주의를 기대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좌파 언론은 이를 ‘민주주의 원칙을 저버리는 야합’이라 비판하였다. 분노한 학생들과 청년 당원들이 ‘동지들에 대한 배반과 기민?사민 연합정권’에 대해 항의하여 본에 있는 사민당 당사를 습격하였고, 경찰과 군인이 배치되어 사민당 당사를 보호하는 사태까지 연출되었다.
키징거를 총리로 하는 사민당과의 대연정에서 부총리 겸 외무장관인 브란트는 본격적 가동에 앞서서 신동방정책 이행 조건을 조성하면서 시험 가동하게 된다.
기민련/기사연의 키징거 총리 역시 새로운 시대의 흐름에 맞는 동방정책 변화를 모색하고 있었다. 1966년 12월 13일 그는 총리 취임사에서 자신이 1955년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소련과의 외교관계 수립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던 사람이라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소련과의 관계에 관해 말했다.
소련에게 독일 통일은 문제가 될 것임을 알고 있으며 이의 해결이 소련에게 어려워 보일 것이다. 정치적 통찰력과 모든 관련 당사자를 이해하려는 긴 안목에서의 의지에 의해 이런 어려움은 극복될 수 있다. 이것이 키징거 총리의 신념이며, 서독 정부는 이 신념에 기초해서 움직일 것이다.
그리고 국경 문제를 언급하면서 폴란드와의 화해에 대한 강한 희망을 표명하였다. 그리고 환경이 허락한다면 동유럽 국가와 외교관계를 수립하겠다고 하여 기민련/기사연이 종래까지 고수해온 할슈타인 원칙을 바꿀 수도 있다는 의중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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