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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독일 통일(59)] 4강국 협정 조인

칼럼니스트 취송 승인 2019.08.21 11:15 의견 0

결국 울브리히트는 1971년 5월 3일 건강을 이유로 제1서기직을 사임하였다. 이 무렵 소련의 그로미코 외무장관은 에곤 바르에게 폴란드와 동독과의 협상이 늦어지는 데 대해서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언질을 주었다. 통일 후인 1994년에 나온 독일연방의회의 통일관련 조사위원회 보고서에도 나오듯이 울브리히트 사임도 동서독 교섭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소련과의 긴밀한 협력 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1970년 12월 7일에 바르샤바조약 조인이 이루어졌다.

동독 수뇌부 문제에 대한 소련의 협력(?)이 있었듯이 유럽 데탕트의 전제로서 동서독의 현상유지에 관한 규범체계 구축에 4강국은 이해를 같이 하였다. 그 연장선상에서 4강국은 동서독 간 긴장의 뇌관으로서 베를린에 관한 협의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서독의 셸 외무장관이 베를린의 상황 개선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모스크바조약의 비준이 어려울 것이라고 언명하였듯이 베를린 문제에 대한 4강국의 합의는 신동방정책 실현의 중요한 전제조건이었다.

1970년 겨울 4강국 대사들은 베를린에서 협의를 계속하여 1971년 봄에 기본적인 사항은 타결을 보았다. 베를린에 관한 4강국의 합의는 3단계로 구성되어 있었다.

첫째, 통신과 출입에 관한 4강국의 합의, 둘째, 독일 내부 즉 동서독의 합의, 셋째, 합의 사항 전체를 발효시키는 최종의정서로 구성되어 있었다.

1971년 9월 3일 베를린에 관한 4강국 협정(Four Power Agreement on Berlin. Quadripartite Agreement on Berlin)이 서명되었다. 이는 1949년 베를린 봉쇄 이후 4강국이 베를린에 관해 처음으로 합의한 것으로, 전문에서 “4강국의 권한과 책임 및 전시와 전후의 4강국의 협정과 결정에 기초하여”라고 명시하고 제1장 총칙 3조에서 4강국의 권한과 책임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규정하여 전체로서 독일과 베를린에 대한 4강국의 최종결정권을 다시 한번 확인한 바탕에서 협정을 체결한 것이다.

소련이 처음으로 서베를린의 경제와 정치적 생존에 필수적인 3가지를 인정하였다. 방해받지 않는 출입과 입국, 그리고 통신에 관하여 합의를 보았다. 그러나 4강국의 협정에서 동독이 정식 국호(독일민주공화국: German Democratic Republic)가 사용되었다는 점과 동독 영토를 지나는 서베를린 통행에 관하여 소련이 동독과 협의하여 3개국에게 통보해줄 것으로 합의하여 동베를린이 동독의 수도임을 묵시적으로 인정하고 있다(부록 I/III).

그리고 서독과 서베를린의 유대를 인정받은 대신 소련과 동독이 요구해온 서베를린에서 서독 대통령 선거나 공식적 행위(constitutional or official acts)를 하지 않기로 양보한 것(부록 II)은 후에 분단을 영구화한 것이며 지나치게 양보했다는 논란의 근거가 된다. 이 협정이 장벽을 철거시키지도 못했고, 서베를린이 서독의 일부가 아니라는 것을 명시적으로 재확인하고(부록 II/IV), 재통합에 관한 아무런 합의도 없이 소련 관할 지역을 동독에 편입시켰을 뿐이었다.

4강국이 긴장 완화를 위하여 노력을 기울이고, 이 지역에서 무력 사용 위협이나 무력 사용이 있어서는 안 되며, 분쟁은 평화적 수단에 의해서만 해결되어야 한다고 합의하였지만, 베를린의 안전은 결국 소련이 보장할 때에만 가능한 것이었다.

모스크바조약과 함께 베를린협정은 크게는 현상 인정에 의한 유럽의 평화공존, 좁게는 분단 현실을 인정한 바탕에서 동·서독의 평화공존의 첫 번째 관문인 셈이다. 이는 통행과 통행에 관한 세부 사항은 동·서독 간의 합의에 맡기고 그 합의에 따라 최종의정서 조인 시에 4강국 협정이 발효한다고 명시하여 동·서독 간의 협상을 예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어서 9월 16~18일 브란트 총리는 에곤 바르를 대동하고 얄타 근처의 휴양지 오레안다(Oreanda)에서 브레즈네프와 비밀 회동을 하였다. 브레즈네프의 제의에 의한 것이었다. 당시 양자 간 관계 발전, 모스크바 조약 비준, 4강국의 베를린 협정, 경제교류 및 유럽안보협력회의 관련 논의가 있었다. 동방정책과 관련하여 광범위한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표면상 논의의 중심은 중부 유럽에서의 병력 감축에 관련된 것이었다. 당시 소련의 주된 관심이 군축을 포함한 긴장완화에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브란트는 서독이 관계 정상화와 교역확대를 원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서독의 목표는 정치적 관계 개선과 대결구도의 폐기 및 그 결과에 따른 군축이었다. 귀국 길에 브란트는 미국, 영국, 프랑스 대통령과 총리에게 브레즈네프가 긴장완화 확대를 원한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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