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않았다> (사진출처: 예스24)
◇여성이 쓴 역사서
일반적인 역사는 남성적이다. 등장인물도 남성이고, 그 흐름도 남성이다. 기록자도 남성이다. 특히 전쟁을 다룬다면, 더 남성적일 수밖에 없다. 군인을 떠올리면 남성이 떠오르고, 아비규환(阿鼻叫喚)과 같은 전황에 어울리는 이미지도 강한 남성이다.
“하지만…… 그건 모두 남자들이 남자들의 목소리를 들려준 것이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않았다> 중
작가는 이런 기존의 관점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우선, 역사를 서사적으로 정리하지 않고, 액자식으로 구성했다.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가 기존 역사 서술 방식을 새롭게 액자식으로 시도했다면, 작가는 그 기법을 따르면서 한 인물, 한 인물을 다룬다.
다음으로 주인공이 여성이다. 이야기의 99% 이상이 여성의 이야기다. 가끔 나오는 남성의 이야기조차도 보조적인 역할일 뿐이다. 많은 등장인물이 등장함시켜 주인공과 주연의 경계를 없앴다.
“그렇다면 역사는? 역사는 거리에 있다. 군중 속에. 나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역사의 조각들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않았다> 중
마지막으로 서술자가 여성이다. 남성의 시각이 아닌, 여성의 시각으로 서술하고 묘사하다 보니, 기존의 역사책과 다르다. ‘이런 것도 역사가 될 수 있구나!’라는 놀람을 준다.
“‘여자’의 전쟁에는 여자만의 색깔과 냄새, 여자만의 해석과 여자만이 느끼는 공간이 있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않았다> 중
◇전쟁: 끝나지 않았다
등장인물들의 공통분모는 제2차 세계대전이다. 그리고 일방적으로 러시아 측에서 정리됐다. 따라서 독일은 적(敵)이나 이상하게도 패배자를 격멸하지 않는다. 전쟁의 끔찍함 속에서 승패는 의미 없음을 내포한다.
특히, 여자와 전쟁에서 승리는 무관하다고 말한다. 남성은 전쟁 영웅이라도 될 수 있지만, 여성은 그런 권리조차 주어지지 않고, 오히려 이후 삶도 새로운 전쟁이 될 수 있음을 서술한다.
1918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대전이 종료됐다. 제2차 세계대전은 1945년 8월 15일에 종료됐다. 그러나 러시아의 승리 일은 1945년 5월 9일이다. 승리도 관점에 따라 그 날짜가 달라진다. 똑같은 전쟁이지만, 러시아(구소련)는 5월 9일을 기념하고, 우리나라는 8월 15일을 기념한다. 같은 전쟁이지만, 그 날짜가 다르다. 참혹한 전쟁의 끝도 100일 정도가 다르다. 누구에게는 종전이었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의 시점에서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어린이날이 있고, 어버이날이 있고, 성년의 날이 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는 승리의 달이다. 나치를 물리친 날이고, 해방의 날이다. 반대로 독일에는 참회의 날이며, 항복의 날이며, 치욕의 날로 기억된다.
종전이라 하더라도 그 기억은 누구에게나 끔찍하다. ‘승리’를 기념함으로써 인간은 잔혹한 기억을 기쁨으로 바꿔치기한 셈이다.
“사람들은 전쟁의 역사를 승리의 역사로 몰래 바꿔치기해버렸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않았다> 중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세대에게 전쟁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즐기는 여가의 일부분이다. 모든 역사는 현재에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현재의 스마트한 삶이 과거 처참함을 생생하게 전달하기는 힘들다. 이미 편집된 전쟁만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전쟁의 역사를 현재의 시각으로 본다면, ‘승리’, ‘패배’로만 나타낼 것이다. 그래서 전쟁은 모험이 되고, 그 잔혹함은 감동으로 전환된다.
“‘……우리는 현재로부터 과거를 바라본다. 현재를 벗어나서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않았다> 중
그러나 그 생사의 과정을 겪은 사람들에게 전쟁은 지옥과 다를 바 없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작가는 여자와 전쟁을 다르게 본다. 여자와 ‘승리’는 별개였다고 말한다. 여성은 전쟁 중에 맹렬한 전사였고, 그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우리는 승리를 빼앗겼어. 우리의 승리를 평범한 여자의 행복과 조금씩 맞바꾸며 살아야 했다고. 남자들은 승리를 우리와 나누지 않았어.”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않았다> 중
그러나 전쟁 영웅은 남자였고, “여자는 뜻밖에도 하나같이 똑같은 반응들. ‘어휴, 너무 끔찍하다. 어떻게 그걸 다 겪었대? 그러고도 제정신으로 살 수 있었대?’”라는 편견 속에서 승리 이후의 날을 보내야만 했다.
전쟁 이후 후유증으로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종종 간접적으로 본다. 그 대상들을 가만히 훑어보면, 모두 남성임을 알 수 있다. 작가는 ‘남자만 있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실제로 전쟁은 남자만의 전쟁이 아니었음에도.
“이제부터 진짜 삶이 시작된다는 대화가 오갔어. 기쁘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어. 전에는 죽음을 두려워했는데, 이제는 살아갈 일을 두려워하게 된 거야…… 둘 다 무섭긴 마찬가지였어.”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않았다> 중
여성들의 삶 역시 후유증의 연속이었다. 남성이 후유증에 대한 동정을 받을 때쯤 여성은 편견을 돌려받았다. 그녀들의 희생은 ‘독종’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와 그녀들의 삶을 내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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