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에서는 ‘불확실성의 원리’를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아인슈타인’과 ‘닐스 보어’의 유명한 토론은 지금까지도 회자 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아인슈타인이 토론에서 졌습니다. 그리고 유명한 말을 남겼죠.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그는 ‘우연’이라는 단어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토론의 승리자 닐스 보어는 “신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말게!”라고 했다고 합니다. 아인슈타인이 생각했던 신은 목적이 있는 세상체입니다. 즉, 인과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이죠. 그래야 모든 것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규칙이 나올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닐스 보어는 ‘신’ 자체를 규정하는 아인슈타인을 비판한 것이죠. 감히 신의 존재는 ‘이러하다~’라고 규정하려는 인간을 비판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 전에는 뉴튼의 법칙이 세상을 이해하는 공식이었습니다. 현재 그 공식은 깨졌고, 그 공식을 깼던 아인슈타인의 이론도 깨졌습니다. 이게 과학입니다. 언제라도 진리로 믿었던 사실이 진리의 자리에서 내려올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절대적인 진리가 없다는 것. 현재 우리는 기본적으로 복잡성과 불확실성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면서도 굳이 인과관계를 따집니다. 수많은 사건, 사고에 대한 분석 기사가 인과관계를 따지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인과관계를 여전히 중요시합니다. 실제로는 인과관계를 찾기 힘든 데도 말이죠.
사회 구성원이 더 다양해졌습니다. 그래서 단군 할아버지 이래 존속한 한민족은 상상 속에서만 가능합니다. 솔직히 대한민국은 더 이상 한민족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다문화 사회에서 다문화 국가로 이행하고 있으며, 문화적으로도 다양성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남북만 하더라도 분단 이후 역사적 시공간에 대한 인식이 확연하게 다릅니다. 남한은 1961년 이후 ‘서기(AD)’를 사용하고 있는 반면, 북한은 ‘주체력(김일성 탄생 기점)’을 사용합니다. 공간은 어떨까요? 남한은 ‘대한민국(大韓民國)’에 반영됐듯이 ‘삼한’을 계승합니다. 그러나 북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을 계승합니다. 이때 ‘조선’은 ‘고조선’을 의미하고요.
통일이 되더라도 시공간에 대한 통합을 위해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리라 생각합니다. 아울러 20세기 후반만 하더라도 감히 상상하지도 못했을 성(姓)별도 다양해졌습니다. 남녀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성적 소수자까지도 인정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자긍심 넘치는 표어가 여전히 등장하고 있지만, 분명 ‘퓨전’입니다. 한국적인 것만으로는 세계적인 것이 되기 힘듭니다. 한류만 해도 그렇습니다. ‘강남 스타일’이나 ‘BTS’의 음악이 한국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한국 사람이 부르는 노래라는 의미에서 한국적이긴 합니다. 하지만, ‘아리랑’과 비교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계획대로 추진했다고 해서 성공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결과를 보고 원인을 분석하기는 하지만, 그 원인이 정답이었다고 확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즉, 불확정성 원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원칙이 되고 있습니다. 대런 애쓰모글루 등이 쓴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도 국가 발전은 반드시 필연적인 조건만으로 이뤄진 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자들은 ‘우연(contingent)’이 국가의 발전과 세계사의 기록에 중요한 요소였다고 주장합니다.
정치도 마찬가지입니다. ‘MZ’로 묶어 보려고 했던, 정치인들의 낭보를 계속 전해 듣습니다. ‘M’과 ‘Z’는 외칩니다. “우리를 당신들 마음대로 묶지 마!!!”,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 그리고 한마디 더 합니다. “우리는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런 세대가 아니야!”라고 말이죠. 최근에는 십대들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법이 제정됐습니다. 십대들도 투표할 수 있고, 원하면 공직 후보가 돼 당선될 수도 있습니다.
한 정당 대표는 십대들의 선전을 기대하면서 대학에 들어 갈 때 좋은 이력이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30대 당대표로 청년 세대의 지지를 받았는데, 생각하는 수준을 보면 자녀들의 대학입시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현재 50대 이상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정치는 더 복잡하게 될 것이고, 예측도 더 어려워질 듯합니다. 정당 지지자들의 연령대도 과거처럼 구분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현재처럼 유사한 거대 양당체제가 지속되면 중도층 유권자들이 훨씬 더 늘어날 거고요.
불확정성 시대에 중앙정부의 확대, 중앙권력의 강화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입니다. 과거에는 개미가 공룡의 걸음을 따라가야 했습니다. 당연히 개미는 공룡을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수도권 중심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바뀌어야 합니다. 개미의 발자취를 공룡이 따라야 합니다. 물론, 공룡의 큰 보폭으로는 개미의 디테일한 자취를 따를 수 없습니다. 앞설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땅을 세심하게 밟으면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중앙정부가 지방의 니즈를 이해하고 해결하기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지방이 스스로 자생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권력과 자원을 잘게 나눠서 필요한 부분을 채워나갈 수 있도록 도와 줘야합니다. 그러니 대한민국의 정치발전을 위해서도 지방분권은 필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지난 20대 대선을 살펴봅시다. 십대 청소년들을 위한 공약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혹, 기존 선거와 비교했을 때, 큰 변화가 없다면 왜 그런 것인지 이유를 생각해 봅시다.
십대 청소년들도 선거에 참여할 수 있게 됐습니다. 투표도 할 수 있고, 선거에 출마할 수도 있습니다. 십대 정치인이 등장할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십대들의 정치 참여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정리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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