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지방분권’과 관련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말부터가 쉽지 않습니다. ‘지방분권’을 풀어보면 ‘지방’은 ‘서울’을 제외한 말인 듯하고, ‘분권(分權)’은 왠지 뭔가(권력)를 나눠야 한다는 느낌이 듭니다. 완전한 해석은 아니지만, 대충 이정도 이해하고 있다면 잘 접근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국가를 떠올려 보겠습니다. 우리나라는 삼권분립(입법부, 행정부, 사법부)을 원칙으로 합니다. 여전히 행정부의 권력이 더 강하다고는 하지만, 과거와 비교하면 눈에 띌 정도로 각 부의 힘이 균형을 이뤄나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1960~80년대 같았다면, 대통령 탄핵이 가능했을까요? 절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그 어려운 일을 해냈습니다. 쿠데타가 아니라 민주적으로 절대 권력자를 몰아낼 수 있었습니다. 사실, 절대 권력자 특히, 독재자에 대항한 역사는 1공화국 때부터 있었습니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은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의 강력한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하야했습니다.
이후 아쉽게도 군부독재가 수십 년 이어졌지만, 국민의 저항은 끊임없이 계속됐습니다. 그 결과 1987년에 새로운 헌법의 탄생, 즉 대통령 직선제를 핵심으로 한 헌법 개정이 이뤄졌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국민은 부당한 독재에 대해서 관망하지 않았습니다.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 책임감 있게 저항하고 바로 잡을 때까지 투쟁한 국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과거에는 중앙정부를 중심으로 해서 특히, 서울에 여러 부처를 두고 국가를 운영했습니다. 물론, 당시에도 지방마다 단체장을 두고 지역 특성을 살렸다고 하지만, 지방 관료는 중앙정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중앙정부에서 각 시・도지사 등을 임명했으니까요. 그리고 각 지방을 운영할 수 있는 자원도 중앙에서 나눠주는 시스템이었으니 중앙정부의 권력이 압도적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지방선거를 다시 시작하면서 지방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간략하게 설명하면 우리나라 지방선거는 광복 이후 1952년에 처음으로 실시됐습니다. 그렇게 1960년까지 지방선거가 실행되다가 1961년 군부 쿠데타 이후부터 중단됐습니다. 그러니, 지방자치를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의 실험과 발전은 멈췄고, 중앙정부의 독점 권력이 형성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991년부터 시·군·구의원 선거를 시작해서 1995년 6월에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실시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2022년 6월 1일 지방선거 제8회 지방선거에 이르게 됐습니다.
◆거대한 양당의 어두운 그림자, 그리고 지역이기주의
새롭게 지방선거를 실행한지 30년이 됐지만, 현재까지도 지방선거는 중앙정치의 영향 아래 놓여있습니다. 지역에 적합한 인물이 출마했다고 하더라도 어떤 정당에 속해 있는가에 따라서 당락이 결정됩니다.
예를 들어서 대구광역시장으로 선출되기 위해서는 현재 ‘국민의 힘’ 소속이 아니면 당선될 가능성이 없습니다. 호남지역은 ‘더불어민주당’ 소속이 아니면 당선될 가능성이 없고요.
사실, 수도권을 제외하고는 위 두 정당에서 내세운 후보가 아니면 당선이 쉽지 않습니다. 최근에는 수도권에서 조차도 양당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실정입니다. 거대 양당 정치가 국가 권력 구조의 바탕이 되면, 정치 발전은 더딜 수밖에 없습니다.
정치적 안정이라는 장점이 있을 수 있으나, 유권자 입장에서는 정치 선택의 다양성을 부득이하게 포기해야 합니다. 이런 현상이 고착화되면 최근 선거처럼 정책이 좋아서 지지하는 게 아니라 어느 한 쪽이 싫어서 투표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정치 현상의 최후는 정치적 퇴보와 더불어 정치적 무관심이 만연해지고, 결국 소수가 권력을 독점하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 우민화 정책만 펼치게 될 것입니다. 결국, 국가 위기 상황이 도래할 수밖에 없고요. 이런 정치구조의 문제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지역이기주의로 나타난 님비현상, 핌비현상
아울러 지역이기주의로 대변되는 ‘님비’현상과 ‘핌비’현상이라는 병폐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님비 현상은 공익적일 수는 있으나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 유익을 주지 못 한다면, 반대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핌비’현상이란, 좋은 시설은 우리 지역에 유치하겠다는 것이죠.
20년 전(2002년도) 대한민국에는 “대~~한민국”이라는 구호가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습니다. 월드컵이 치러진 해였습니다. 이때, 우리나라는 월드컵 경기장을 10군데 신설했습니다. 이 중에서 3군데(부산, 대구, 인천)를 제외하고는 축구 전용 구장으로 신설했습니다. 즉, 축구 경기 이외에는 활용하기 힘들다는 의미죠.
그렇다면, 우리나라보다 면적이 넓은 일본은 어땠을까요? 당시 일본의 경제력은 우리나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습니다. 그런데도 신축 8개 구장, 2개는 증축이었었습니다. 그리고 10개 구장 중 세 군데만 축구 전용구장이었고요.
기존의 축구 인프라가 일본보다 부족했기에 우리나라가 더 많이 신축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큰 요인은 바로 ‘핌비’ 현상이었습니다. 너도 나도 월드컵 경기를 유치하려고 했고, 그 결과 각 지역마다 월드컵 경기장을 신축하게 된 것이죠. 그러나 월드컵 이후, 축구전용 구장은 관리하고 운영하는 데 큰 골치 덩어리가 됐습니다. 왜냐하면, 축구 경기 이외에는 활용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다른 예로 2000년대 초반 서울에는 ‘걷고 싶은 거리 만들기’가 유행이었습니다. 서울 인사동 거리를 시작으로 서울 각 구의 여건을 고려해서 거리를 조성하고자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대부분 자치구에 거의 하나씩 조성됐습니다.
특히, 서대문구는 창천동과 대현동(현재 통합돼 신촌동)에 2군데가 조성됐는데, 이후 주차공간이 부족하다는 민원이 발발해서 조성된 거리가 복원될 처지에 놓이기도 했습니다.
현재는 서울 곳곳 동네의 이름을 따서 “~~길”등이 자치구에 하나 이상씩 조성되는 중입니다. 천편일률적인 거리조성이어서 특화 거리라는 취지가 거의 사라진 수준입니다. 이런 현상은 지방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억지춘향’ 격 거리–특히, 근대화를 테마로 한 거리–등이 조성되고 있으며, 이런 거리들의 최후는 ‘젠트리피게이션’현상으로 변질된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대구광역시의 ‘김광석 거리’는 최초 취지와 다르게 문화적 성격은 줄어들고, 상업적 공간으로 변질됐습니다. 거리에 사람이 붐비면, 결국 상업주의가 등장하고 원래 성격을 잃어버리는 게 공식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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