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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전투선] 조선 수군의 돌격함 거북선 2

이호국 작가 승인 2023.12.20 12:17 | 최종 수정 2023.12.31 08:26 의견 0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의 실체를 알 수 있는 유물이나 자료들이 없다 보니 임란 시기 거북선에 관한 많은 논쟁이 존재하는데,

① 거북선은 2층 구조인가, 2.5층 구조인가, 3층 구조인가.

② 거북선의 용두는 고정형 인가, 들락거린 이동형인가.

③ 지붕 전체를 덮은 유선형 개판인가, 중앙부가 좁은 돌출형 개판인가.

④ 개판 위에 철을 덮은 철갑선인가, 아닌가.

⑤ 전통식 노(櫓)인가, 서양식 노인가.

이렇게 다섯 가지의 논쟁이 가장 대표적인 거북선 논쟁으로 지금부터는 이 다섯 가지의 논쟁을 기반으로 하여 복원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3. 복원 중인 거북선

거북선 기초 복원도. (거친펜 스튜디오)

제가 그린 거북선 그림은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 기록과 정조대의 후기 거북선 기록을 혼용하여 그린 것입니다.

이에 임란 당시의 거북선을 판단하기에 앞서 그려본 그림으로, 3D 복원 거북선의 기초 그림이기도 합니다.

먼저 위에서 나열한 다섯 가지의 대표 논쟁 중

①의 논쟁에선 3층 구조를

②의 논쟁에선 고정형 용두를

③의 논쟁에선 지붕 전체를 덮은 유선형 개판을

④의 논쟁에선 철갑이 아닌 나무 개판을

⑤의 논쟁에선 전통식 노를

택하여 복원하였습니다.

기초 복원도를 토대로 복원 중인 3D 거북선. (거친펜 스튜디오 · 스냅툰)


첫 번째 복원 이야기

거북선의 기초선은 판옥선입니다.

제가 임진왜란 전투선 연재의 첫 번째로 판옥선을 정한 이유가 있는데, 연재 글에서도 상세히 적어놨듯이 판옥선 이전의 주력 함선인 맹선은 왜변과 왜란 등의 실전에서 한계를 드러낸 선박입니다.

격군과 전투원들이 한데 뒤섞여 문제가 많다는 기록들이 수없이 등장하고,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격군과 전투원들을 분리한 3층 구조의 판옥선을 개발했다고 명종실록은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 사례를 가장 먼저 든 것은 2층 구조의 함선으로는 원활한 해전을 치를 수 없다고 이미 정의한 명종 시대의 조선인데, 오랜 세월이 지난 것도 아닌 상황에서 2층 구조의 함선을 다시 개발했다는 점이 일단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아무리 전라좌수영 단독 개발에 특수 목적 함선이라도 과연 2층 구조의 거북선을 만들었을까 하는 의문이 먼저 듭니다.

무엇보다 판옥선 개발자이자 시대의 명장으로 수군절도사까지 여러 번 지낸 진짜배기 전선 제작 전문가인 정걸(丁傑)이 당시 전라좌수영 조방장(助防將)으로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과연 이순신이 정걸에게 자문을 구하지 않았을까도 의문이고, 혹여 정걸이 자문을 했더라도 2층 구조를 추천했을 진 만무합니다.

많은 이들이 거북선 하면 나대용(羅大用)을 떠올리지만, 한 시대를 앞선 함대·함선 운용과 함선 제작 전문가 중의 전문가인 정걸의 존재가 이순신의 요청으로 인해 엄연히 전라 좌수군 과 함께 했다는 점도 사족에 속할지언정 간과할 수는 없는 문제입니다.

이런 이유로 복원한 거북선은 많은 기록(최근에 밝혀진 기록들 포함)과 학계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판옥선 중선(이하 중전선으로 표기)에 기반하여 본판(저판 : 선체 바닥)이 17.60m~20.68m, 상부는 20.53m~24.12m의 크기를 상정하여 최종적으론 길이 24m, 폭 8.7m, 높이 7.8m의 실제 크기로 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발발했던 해로부터 110여 년 정도가 지난 1704년 발간된 양남수군변통절목에서 거북선의 승조원 수가 나오는데, 승선 인원은 총 158명입니다.

승조원 구성으로는 선직 2명, 무상 2명, 타공 2명, 정수 2명, 좌우 포도장 2명, 사부 14명, 화포장 8명, 포수 24명, 노군 100명으로 편성돼있다. 참고로 양남수군변통절목에서는 모든 전선의 선장 표기는 빠져있습니다.

이렇듯 거북선의 크기와 총 승선 인원을 나열한 것은 구조 이해를 위한 포석으로 2층과 2.5층의 거북선은 크기 비례 160여 명의 인원수를 감당하지 못합니다.

시간 차이가 분명 있지만, 개인적으론 임란 당시도 큰 차이는 없었을 것으로 보이며, 2층과 2.5층이 아닌 3층 구조로 보아도 폭 8.7m, 길이 24m의 2층 갑판에 격군만 100명이다. 거기다 개판으로 인해 2층보다는 상대적으로 협소한 3층 상갑판도 최소 인원의 전투원만 46명 이상입니다.

무엇보다 이 많은 인원이 먹을 식량들과 식수, 전투에 사용했던 수많은 화포와 대장군전(외 장군전류), 각종 포탄, 화약, 장전을 위한 도구, 각종 개인 무기(냉병기와 소형 화기), 선박 수리용 예비 목재와 부러지거나 파손을 대비한 예비 노 등 오만가지 화물들을 생각한다면 거북선 선내가 얼마나 복잡해질지는 불을 보듯 뻔합니다.

여기에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전투 시엔 돛을 접고 눕히는데, 무려 쌍돛이란 점입니다.

3D 복원 중인 거북선 2층 갑판 내부 모습 1. 이해를 돕기 위해 바닥 부분을 제거하였다. (거친펜 스튜디오 · 스냅툰)
3D 복원 중인 거북선 2층 갑판 내부 모습 2. 이해를 돕기 위해 바닥 부분을 제거하였다. (거친펜 스튜디오 · 스냅툰)
3D 복원 중인 거북선 3층 상갑판 내부 모습 1. 이해를 돕기 위해 지붕 일부 구조물들을 제거하였다. (거친펜 스튜디오 · 스냅툰)
3D 복원 중인 거북선 3층 상갑판 내부 모습 2. 이해를 돕기 위해 지붕 일부 구조물들을 제거하였다. (거친펜 스튜디오 · 스냅툰)

글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아 복원 중인 거북선 내부를 공개하였습니다.

눕혀 있는 쌍돛이 차지하는 공간이 의외로 상당합니다. 기존의 복원된 판옥선, 거북선들에선 돛을 눕힌 사례가 거의 없어 공간적 제약이 이렇게 심할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것입니다. 이제야 위에서 언급한 내용을 100% 이해하시리라 보며, 2층과 2.5층, 3층이지만 최근에 등장한 3층 중앙부가 좁은 개판 사례를 부정하는 것도 이러한 관점이 큽니다.

이쯤에 다시 한번 거북선 글의 상단부에 남겼던 선조수정실록의 내용과 이순신이 직접 언급한 임진장초의 글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에 앞서 순신은 전투 장비를 크게 정비하면서 자의로 거북선을 만들었다.

이 제도는 배 위에 판목을 깔아 거북 등처럼 만들고 그 위에는 우리 군사가 겨우 통행할 수 있을 만큼 십자(十字)로 좁은 길을 내고 나머지는 모두 칼·송곳 같은 것을 줄지어 꽂았다.

그리고 앞은 용의 머리를 만들어 입은 대포 구멍으로 활용하였으며 뒤에는 거북의 꼬리를 만들어 꼬리 밑에 총구멍을 설치하였다.

좌우에도 총구멍이 각각 여섯 개가 있었으며, 군사는 모두 그 밑에 숨어 있도록 하였다. 사면으로 포를 쏠 수 있게 하였고 전후좌우로 이동하는 것이 나는 것처럼 빨랐다.

싸울 때에는 거적이나 풀로 덮어 송곳과 칼날이 드러나지 않게 하였는데, 적이 뛰어오르면 송곳과 칼에 찔리게 되고 덮쳐 포위하면 화총(火銃)을 일제히 쏘았다. 그리하여 적선 속을 횡행(橫行) 하는데도 아군은 손상을 입지 않은 채 가는 곳마다 바람에 쓸리듯 적선을 격파하였으므로 언제나 승리하였다.

조정에서는 순신의 승보를 보고 상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를 가자(加資) 하였다.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5월 1일 경신 20번째 기사

그런데, 신이 일찍이 왜적들의 침입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별도로 거북선을 만들었는데, 앞에는 용머리를 붙여 그 입으로 대포를 쏘게 하고, 등에는 쇠못을 꽂았으며 안에서는 능히 밖을 내다볼 수 있어도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볼 수 없게 하여 비록 적선 수백 척 속에라도 쉽게 돌입하여 포를 쏘게 되어 있으므로 이번 출전 때에 돌격장이 그것을 타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먼저 거북선으로 하여금 적선이 있는 곳으로 돌진케 하여 먼저 천·지·현·황 등 여러 종류의 총통을 쏘게 하자, 산 위와 언덕 밑과 배를 지키는 세 곳의 적들도 철환을 비 오듯 난발하는데, 간혹 우리나라 사람도 섞여서 쏘고 있었습니다.

임진장초

제2차 당포. 당항포 등 네 곳의 승첩을 아뢰는 계본

만력 20년(1592) 6월 14일 자 장계 초안

개인적으론 이 두 기록에 거북선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앞서 이 기록들과 더불어 맹선의 사례와 판옥선을 설계한 정걸의 사례를 남긴 이유도 그간 거북선에 관한 논쟁에서, 많은 이들이 임진왜란 이후의 거북선 기록들에만 시선이 고정된 것이 아닌가? 하여 남긴 것입니다.

2층 구조인 맹선의 약점을 보완하여 만든 함선이 판옥선인 점과 이 판옥선을 기반으로 개조한 함선이 거북선인 것을 보면, 이순신 입장에서는 아주 당연하기에 어떤 구조로 만들었는지 보고 할 이유가 사실상 없다고 판단합니다.

그리고 이순신은 1591년 2월에 전라 좌수사로 부임하여 언제 터질지 모를 병화의 조짐에 말 그대로 하루라도 빨리 정신없이 거북선을 만들었을 터입니다.

이런 와중에 제가 이순신이라도 80세의 노장 정걸을 1순위로 모셨을 것은 당연합니다.

정걸이야말로 이순신에게는 조력자이자 스승과도 같은 존재로, 판옥선을 설계한 장수이자 수군절도사만 4회를 역임했을 정도로 함대·함선 운용의 당대 최고의 전문가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정걸이 거북선 건조에 깊숙이 관여한 것은 기정사실로 봐야 합니다.

누구보다 2층 구조의 약점을 잘 알고 있는 정걸이 바보가 아닌 이상 2층과 2.5층 구조를 추천했을 리 없습니다. 또한 판옥선의 복원력에 관해서도 정걸만큼 아는 사람도 없었을 것이고, 무엇보다 왜변을 겪은 정걸은 왜선을 잘 아는 인물이라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이충무공전서 귀선도설(龜船圖說)의 통제영 거북선(좌)과 전라좌수영 거북선(우)의 모습.

이충무공전서의 통제영 거북선과 전라좌수영 거북선의 모습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도설의 설명문에선 '이 가운데 통제영에 있던 거북선이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에서 유래한 것이며, 다만 치수에 가감이 있다'라고 명확하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으론 통제영 거북선에선 용머리와 개판 부분이, 전라좌수영 거북선에선 선체 부분이 이어지지 않았을까 추정 중으로 통제영 거북선의 용머리 기능과 개판 부분의 통로가 이순신의 장계 기록과 흡사하며, 전라좌수영 거북선은 선체의 모습이 판옥선과 매우 흡사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3D 복원은 귀선도설의 통제영·전라좌수영 혼용의 모습으로 제작하고 있으며, 아래의 복원 이미지가 현재 제작 과정 중에 있는 거북선의 모습입니다. 3D 이미지는 독자들의 이해와 비교를 한눈에 볼 수 있게 판옥선과 거북선을 함께 두었으며, 진행 중인 거북선의 복원안은 두 가지 형태로 기획되었습니다.

3D 복원 진행 중인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 전선들의 모습. (거친펜 스튜디오 · 스냅툰)

막상 복원을 진행해 보니 판옥선에 바로 개판하는 것이 선조수정실록과 이순신의 장계 기록에 더 일치하는 모습이 보이고, 함선 건조의 효율성도 훨씬 뛰어나게 느껴졌습니다.

특히 안에선 밖이 보이되 밖에선 내부가 보이지 않는 기록에 정확히 일치하지만, 아직 다른 모습의 거북선은 아쉽게도 진행 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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