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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 작가의 3.1혁명(8)]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주도한 만세운동②

이동진 작가 승인 2019.05.15 16:58 | 최종 수정 2019.07.04 01:52 의견 0

지난 회에 이어 오늘도 여성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여운형, 신한청년당을 조직해 독립운동 네트워크를 만들다(http://www.sisa-n.com/26988)”편에서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했던 김규식을 언급한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김규식은 여운형의 부탁을 받고 파리로 넘어가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이야기 했으며, 3.1운동처럼 조선이 독립을 열망한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알려야 한다고 피력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 위대한 여성 독립운동가 김순애

여운형의 부탁을 받은 김규식은 서둘러 결혼한 후 10일 만에 파리로 넘어갑니다. 그런데 김규식의 결혼은 가정을 꾸리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독립운동을 열심히 하기 위해 했던 전략적인 결혼었습죠.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김규식의 아내였던 여성 독립운동가 김순애에 대한 내용입니다.

▲ 결혼초기 김규식과 20대의 김순애. 부부 모두 독립운동을 위해 온 몸을 바쳤다. ⓒ 위키백과


당시 김규식의 나이는 38세, 김순애의 나이는 30살이었습니다. 김규식이 파리사절단으로 가서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했습니다. 김순애는 중국과 국내를 오가며 남편 김규식의 활동자금을 모으기 위해 열심히 움직였습니다.

일본 헌병의 눈을 피하려다보니 부부의 삶은 그 자체가 고난이었습니다. 가정보다는 나라의 독립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부모로서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죠. 대신 자신이 가진 모든 자원을 활용해 독립운동을 위해 앞장섰습니다.

여성이 저평가되는 당시 사회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김순애는 ‘김규식의 아내’라는 별칭이 아닌 자신의 이름 ‘김순애’로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합니다. 신한청년당의 이사로도 취임했으며 흑룡강 국립여자사범학교 학감도 지냈죠. 평양에서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해 독립군 자금을 모금하여 임시정부에 보내기도 했습니다. 이후에도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하며 우리나라 여성 독립운동가로서 활발하게 활동했습니다.

¶ 치맛자락에 독립선언서를 숨겼던 김마리아

동경에서 발표 된 2.8독립선언서가 3.1운동의 자극제가 되어 독립운동을 촉발했다는 이야기는 이야기도 이미 소개했죠. 이때 독립선언서를 숨겨서 들어오기 위해 김마리아라는 여성의 치맛자락에 숨겼다고 말했습니다. 김순애는 김마리아의 고모이며 독립운동을 위해서 발 벗고 나섰던 집안의 일원이었습니다. 김마리아는 도쿄의 독립선언 열기를 국내에 전파한 이후에도 군자금 조달, 임시정부 황해도 대의원으로 활동하는 등 다양한 독립운동을 전개합니다.

김마리아, 김순애는 모두 황해도에 있던 자생토착교회인 소래교회 출신의 인물들입니다. 민족정신을 가진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나왔죠. 소래교회를 세운 서경조 역시 독립운동가의 가문에서 자라 교회를 세웠으며 그의 아들 서병호는 신한청년당원으로 독립운동을 펼쳐 나갑니다.

▲ 서울 송파구 정신여중·고교 교정에 있는 김마리아 흉상 ⓒ 위키백과


¶ 군자금 모금은 물론 광복군으로 무장투쟁에 나선 안경신

기독교계 여성독립운동가 중에는 안경신이 있습니다. 안경신은 평안남도 출신으로 평양에서 3.1운동을 전개한 인물입니다. 이후 대한애국부인회에서 활동하며 상해에 군자금을 전달하는 교통부원으로 활동했으며 직접적인 무장투쟁에도 참여하며 이후 광복군에서도 활동한 인물입니다.

여성운동가들 역시 남성운동가 못지않게 항일 투쟁을 활발히 전개하고 3.1운동과 임시정부에서 큰 역할을 했지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현실입니다. 오늘은 조국을 위해 독립운동에 목숨을 던진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떠올려보면 어떨까 합니다.

[글쓴이: 이동진 / 시민들과 함께하는 역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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