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메뉴

[이동진 작가의 3.1혁명(6)] 3.1운동을 이끈 민족대표 33인을 비판하다

이동진 작가 승인 2019.04.23 09:23 | 최종 수정 2019.07.04 01:48 의견 0

지난 회에서 설명했듯, 3.1운동의 뼈대는 여운형이 신한청년당을 세우며 하나하나 만들어집니다. 김규식의 제안으로 동북아 요충지에 신한청년당이 파견되며 만세 운동의 인프라가 구축되었습니다. 국내에도 신한청년당원을 보내면서 독립운동의 원로들을 자극하며 만세운동의 기틀을 공고히 해갑니다.

이후 기독교와 천도교가 손을 잡고 민족대표 33인을 구성했으며, 최남선이 독립선언서를 작성합니다. 만세 운동의 날짜도 3월 1일로 정해지며 천천히 3.1만세 혁명이 준비됩니다.

▲ 3.1운동 당시 시위대에 대응하기 위해 도열해 있는 일본 군경 ⓒ 위키백과


¶ 3.1운동의 위기, 종로경찰서 신철형사에게 발각되다

물론 3.1운동의 준비과정이 순탄했던 것은 아닙니다. 당시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인 신철에게 적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조선인이지만 독립운동가를 닥치는 대로 투옥시키기로 유명한 인사였습니다. 그는 천도교에서 느껴지는 수상한 움직임을 포착하고 독립선언문을 인쇄하던 보성사를 급습합니다. 그 곳에서 독립선언서를 발견하죠.

보성사의 최린은 신철을 불러 식사를 하며 당시 돈 5,000원을 건네며 눈감아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런데 그가 돈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혹자는 돈을 받았다고 하지만, 받지 않았다고 이야기하기 때문이죠. 신철은 최린과의 식사 이후 만주로 장기출장을 떠났다 5월 14일 경 귀국합니다. 그러나 신철은 만세 운동을 사전에 알고 있었음에도 감췄다는 이유로 경성헌병대에 수감되었다 자살합니다.

¶ 민족대표 33인, 친일파와 함께 만세운동을 추진하려 하다

위기는 이외에도 있었습니다. 이 점은 33인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쪽에서 제기되는 이야기입니다.

민족대표 33인들은 이완용과 함께 만세운동을 추진하려고 했습니다. 이완용은 친일파의 대표 인물로 언제든지 “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있다”며 일제에 고발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 광화문 기념비 각 앞에서 만세를 외치는 민중들 ⓒ 위키백과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완용도 만세운동에 대해 발설하지 않았다는 거죠. 왜 그랬을지 추측을 해보자면, 만세운동으로 독립이 될 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마음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친일의 자세를 유지하고 있지만 혹시라도 독립이 된다면 자신이 살아날 구멍도 마련해야 했으니까요.

그렇지만 저는 만세운동에 친일파를 끌어들였다는 자체를 비판합니다. 만일 일이 발설되었다면 거국적인 만세운동은커녕, 거국적인 투옥 사태를 발생시켰을 수도 있었으니까요. 자신들 스스로 힘을 들이지 않고 친일파를 끌어들인 것은 큰 실수였습니다.

¶ 탑골공원에서 태화관으로 독립선언서 발표 장소를 변경한 33인

33인이 비판받는 또 다른 이유는 독립선언서 발표장소를 임의대로 변경한 것입니다. 자신들이 독립선언서를 만들었다면, 탑골공원에서 백성을 집결시키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낭독을 하고 만세운동을 이끌어야 했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들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뒤 종로서로 잡혀갑니다. 자수를 했다는 설도 있지만 여기서는 논외로 넘기겠습니다.

33인이 장소를 변경한 이유는 폭력화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비폭력을 주장하는 그들이 탑골공원에서 만세운동을 직접 주도했다면, 비폭력을 준수하도록 사람들을 이끌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직접 리드하려 하지 않고 폭력을 방지하기 위해 탑골공원으로 가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죠.

▲ 서울 탑골공원에 있는 3.1운동 서판 ⓒ 위키백과


또, 실질적으로 33인 대표가 만세 운동에서 일정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 운동을 이끌어 간 인사들은 학생들과 청년 지식인 세력이었습니다. 33인은 1년 반~3년 정도의 실형생활에 그쳤지만, 실제 만세운동을 한 백성들은 죽거나 다치거나 10년 이상의 실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이들이 민족대표로 쌓은 공로는 인정받아야 하지만 어린 학생들에게 일을 위임했기 때문에 비판받을 여지도 많은 것입니다.

¶ 민족대표 33인, 독립의 의지가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

마지막 비판은 실제 33인에게 자주독립의 의지가 있었는가에 대한 의문입니다. 33인에 속하는 손병희조차 만세운동이 독립을 위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자주독립의 의지를 정확히 드러낸 인물은 이승훈이나 한명훈 정도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33인 중 절반 정도가 친일로 돌아섭니다. 강력하게 친일의 의지를 드러낸 인물도 4~5명이나 되지요.

33인이 제대로 된 독립운동을 추진하지 않았기 때문에 학생들과 민중이 민족에 대한 자각과 독립의 염원을 분출하며 독립운동을 이끌어갔습니다.

[글쓴이: 이동진 / 시민들과 함께하는 역사작가]

<저작권자 ⓒ시사N라이프> 출처와 url을 동시 표기할 경우에만 재배포를 허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