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뮈를 처음 접하는 독자라면 대부분 <이방인>을 먼저 읽을 것이다. 번역자, 출판사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리 두꺼운 소설은 아니다. 좀 빨리 읽는 독자라면, 한두 시간 내에 읽을 수 있는 분량이다. 본문만 읽는다면, 그렇다는 말이다.
대체로 노벨문학상 작품 앞이나 뒤에는 해제가 잔뜩 붙어있다. 독자들이 소설을 이해할 수 있도록 역자들이 써놓은 것들인데, 이 해제를 읽으면 내가 책을 읽은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의 감상평을 확인하기 위해서 소설을 읽은 것인지 좀처럼 알 수 없다. 당장, 수행평가나 면접을 앞둔 사람이라면 본문 대신 실용적인 목적으로 훑어보면 좋을 수 있다.
◇<이방인>을 세 번 읽었다
필자는 대학 시절에 <이방인>으로 카뮈를 처음 접다. 길지 않아서 좋았다. 그러나 작가의 메시지가 다가오지 않았다. 그냥 읽은 것으로 만족했다. ‘나도 카뮈를 읽었다’라는 뿌듯함이 전부였다. 그러다가 3년 전 다시 읽을 기회가 있었다. 대학 시절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주인공 ‘뫼르소’의 말과 생각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었다.
알베르 카뮈, <이방인> (사진출처: 예스24)
그리고 최근에 다시 한번 더 읽었다. 익숙한 느낌이었다. 주인공 뫼르소가 사이코패스처럼 느껴졌다. 카뮈가 소설을 쓸 때 ‘사이코패스’라는 단어가 있었을까? 아마 존재하지 않는 단어였을 것이다.
주인공 뫼르소는 사회 부적응자가 아니다. 일자리에서 나름 인정받고 있으며, 연애도 하고, 대인관계도 좋은 편이다. 다만, 사회 관습에 대해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뿐이다.
필자 역시 세 번 읽고 나서, 주인공이 ‘참 특이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뫼르소가 이방인일까?
겉으로 보기에 뫼르소는 말수 적은 소심한 청년일 뿐이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일상적이지 않다. 그 일상적이지 않은 생각이 행동으로 드러났을 때 많은 오해를 받게 된다. 그는 엄마의 장례식장에서 슬퍼하지 않았다. 그리고 엄마 나이도 잘 몰랐다. 그걸 문제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이상하다고 여겼다. 여기서 뫼르소는 1차 이방인이 된다.
여자 친구가 청혼한다. 그는 선뜻 받아들인다. “사랑해?”라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결혼은 진지한 것이라는 애인의 말에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그녀는 결혼은 진지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나는 “아니”라고 답했다. <본문 중>
주인공은 2차 이방인이 된다.
그가 해변에서 아랍인을 죽인다. 우발적이었다. 법정에서 말한 바로는 햇볕이 너무 강해서 그랬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말을 믿어 주지 않는다. 살인 동기가 굉장히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검사와 변호사 모두 그를 두고 옥신각신 다투는데, 정작 그는 소외됨을 느낀다.
어떤 면에서는, 그들은 나를 제외하고 그 사건을 다루는 것처럼 보였다. 모든 일이 나의 개입 없이 진행되었다. 누구도 내게 의견을 구하지 않은 채 내 운명이 결정되고 있었던 것이다. 때로 나는 모두의 말을 막고 말하고 싶었다. “아니 도대체, 여기 피고가 누구란 말입니까? 피고가 중요한 겁니다. 나도 할 말이 있단 말입니다.” <본문 중>
피고는 내버려 두고, 다른 사람이 피고를 평가하는 중이다. 여기서 뫼르소는 3차 이방인이 된다.
사형 선고를 받고 그가 독방에 머무르고 있을 때, 신부가 찾아온다. 그는 회개를 권한다. 그러나 주인공은 그럴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나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며, 하느님 때문에 그것을 잃고 싶지 않다 <본문 중>
죽음 앞에서 대부분 범죄자는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신을 찾는데 주인공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종교적으로 봤을 때도 이방인이다. 4차 이방인이 되는 순간이다.
그가 이방인 된 이유는 일반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장례식, 결혼, 종교 등 굵직한 인간의 관습 속에 거주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이 볼 때 그는 특이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사고와 생활이 그를 사형까지 끌고 갔던 것이다.
그가 사람을 죽인 걸 용서하자는 게 아니다. 햇볕으로 인한 우발적인 사고라 하더라도, 그는 죄를 저질렀다. 그런데, 그의 우발적 살인죄는 일반적 도덕과 윤리관과 섞여서 범벅돼 계획적인 살인죄가 된다.
“나(검사)는 이 사람이 범죄자의 심정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묻었음을 고발합니다.” <본문 중>
그는(검사) 선언했다. 내가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법규들을 무시했으므로 이 사회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인간의 마음의 기본적인 반응에도 무심했으므로 인간의 마음에 호소할 수도 없을 거라고. <본문 중>
범죄의 팩트는 중요하지 않다. 다른 사람의 해석과 판단이 중요할 뿐이다. 나를 이방인으로 만드는 건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인 셈이다.
◇우리 모두 ‘이방인’인가?
카뮈가 말하고 싶은 말은 ‘우리 모두’에 대한 것일까? 그건 알 수 없다. 다만, 모든 사람은 ‘이방인’적인 요소가 있다.
죽음에 인접해서야, 엄마는 해방감을 느끼고,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준비가 됐다고 느꼈음에 틀림없었다. 누구도, 그 누구도 그녀의 죽음에 울 권리를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다. <본문 중>
다른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그 자식인 뫼르소가 그 어머니를 더 몰랐을까? 뫼르소는 소설의 마지막에서 위와 같이 말한다. 죽은 어머니도 ‘이방인’이 된다. 그녀가 원하지 않던 다른 사람의 눈물 때문에 그 아들마저 사형 선고를 받게 됐다.
일반적으로 다른 행동과 생각은 ‘특이함’으로 간주 된다. 혹은 ‘4차원’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다르다는 게 나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진다. 대세에 순응하는 게 좋다고 한다. 사람들은 주류에 속하려 하고, 모난 돌이 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의 주인공은 순응자가 아니었다.
카뮈는 반항하는 뫼르소를 탄생시키지 못했다. 뫼르소가 죽는다고 해서 세상이 바뀔까? 그냥 엄마의 나이도 모르는 매정한 사람에게 내려지는 적절한 형별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의 개인적인 반항 – 신부를 거절하고, 자신을 변호하려는 행동 등을 하지 않음 – 에 대한 기억은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죽음만이 탈출구(해방)라고 전하는 것일까? 현실 속에서는 몸부림치는 외로운 이방인 ‘한 명’들이 보일 뿐이다. (*글쓴이 생각: 소설의 제목은 ‘이방인들’이 아니라 ‘이방인’이라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 모두 이방인으로서의 성격이 있다고 한다면, 한 명이라는 개인이 아니라, ‘한 명’들이라는 공유하지 못하는 불특정 복수 개인만 존재할 것이다.) (계속)
<저작권자 ⓒ시사N라이프> 출처와 url을 동시 표기할 경우에만 재배포를 허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