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최선의 상황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작 중 주인공 우영우는 자폐증을 앓고 있지만 자기 능력으로 경제 활동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영우의 주변에는 자폐증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드라마 속 주인공인 만큼 우영우에게도 시련이 가해지지만, 그 시련이 현실 속 자폐증 환자가 겪는 것보다는 가벼워 보입니다. 산업사회의 일원이 될 능력을 갖고 있고, 평등 의식 높은 사람에게 둘러쌓여 있다는 점만 봐도 우영우는 평범한 자폐증 환자와 다르게 살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축복받았습니다.
몇몇 가혹한 비평가들은 이 드라마가 모든 장애인을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사회를 만드는 데에 방해가 된다고 여기는 듯합니다. 가혹한 비평가들은 드라마가 '쓸모 있는 장애인'만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는다는 인식을 퍼뜨린다고 이야기합니다. 드라마가 능력 있는 장애인이 비장애인 중심 사회에 포함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묘사할 뿐, 비장애인 중심 사회 자체를 비판하지는 모습은 묘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런 비평가들은 다른 사람이 놓친 부분은 잘 잡아내도, 자신들이 놓친 부분은 절대 보지 않습니다. 한참 앞서 나간 나라와 우리나라를 비교하며 훈수를 둘 뿐, 현실적인 대책은 무엇하나 마련하지 않습니다.
모든 권리는 비용입니다. 비장애인의 권리든 장애인의 권리든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권리는 정부가 예산을 갖고 법을 집행할 때 비로소 구현됩니다. 많은 예산을 가질 수록, 정부는 더 다양한 권리를 보장할 수 있습니다. 권리는 비용을 감당해서 정부 예산을 지탱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확산됩니다.
이는 곧, 가난한 사회는 많은 권리를 보장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누군가의 권리는 누군가가 맡는 비용입니다. 권리를 보장하는 일은 비용을 분담하고 마련하는 일과 떨어질 수 없습니다.
부자의 재산권처럼 비용을 감당하는 사람과 권리를 누리는 사람이 일치하는 경우도 있지만, 장애인의 이동권처럼 비용을 감당하는 사람과 권리를 누리는 사람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갈등은 여기서 발생합니다.
평등 의식을 가진 사람은 특별한 논증 없이 '당연히' 소득 있는 비장애인이 소득 없는 장애인을 위해 비용을 감당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비용이라는 말 자체를 인권 침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평등 의식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평등은 모두에게 똑같이 소중한 가치가 아닙니다. 우리나라처럼 연대 의식이 낮고 서로를 불신하는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연대 의식이 낮고 서로 불신하는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평소에 즐기던 스타벅스 커피를 포기하고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남을 위해 돈을 써야 하는 이유를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없습니다. 선행인 줄은 알지만, 자신이 기꺼이 나서야 할 동기를 느낄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고통받는다는 정보는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연대 의식과 신뢰가 없다면, 그런 정보는 불쾌한 잡음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문제의 핵심은 대중이 무지하고 무관심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기꺼이 비용을 감당하게 할 연대 의식과 신뢰가 없다는 것입니다.
비평가들은 핵심을 놓쳤습니다. 그저 드라마가 나쁜 인식을 퍼뜨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표출할 뿐,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위해 기꺼이 비용을 감당해야 할 이유를 감정적으로 설득하지는 못했습니다. 우리나라가 지나치게 비장애인 중심 사회가 된 이유는 평등을 당연하게 여기고, 다른 사람의 문화 생활에 훈수 두기에 바쁜 사람들 탓입니다. 다른 사람의 탓이 아닙니다. 평등의 적은 대체로 평등주의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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