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 깊은 산 속 진미를 선보인 본격 미식회가 열렸다 (포레스트로드700 제공)
미세먼지조차 없는 청정지역 평창에서 특별한 미식회가 열린다 하여 주말을 반납하고 달려가 보았습니다. 오늘의 목적지는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자락에 자리잡은 '산너미목장'으로 평창의 로컬콘텐츠를 알리는데 앞장서고 있는 평창 청년들의 프로젝트팀 포레스트로드700이 주관한 행사입니다.
이곳에 도착하면 입구부터 쌓여진 200기의 돌탑이 반겨주며 별세계가 펼쳐집니다. 이곳은 어디일까요? 산사일까요? 혹은 숨겨진 고대 유적일까요? 뜻밖에도 이곳은 흑염소가 뛰어노는 숲 속 목장, 산너미목장에서 받은 첫 인상입니다.
산너미목장 가족들의 역사와 애환과 사랑이 담긴 200여기의 돌탑 (사진: 윤준식 기자)
산너미목장은 전국에서 두 번째로 큰 흑염소목장이라고 합니다. 특기할만한 것은 이곳의 흑염소들은 축사에서 길러지지 않고 드넓은 평창의 숲 속에서 방목과 자연순환농법으로 키워지고 있다고 합니다.
산 정상으로 올라가면 흑염소들이 먹고 뛰어놀고 있다고 하는군요. 평소 등산은 싫어하지만 흑염소들도 만나보고 싶고, 가을 하늘 아래 펼쳐진 평창의 숲이 너무 아름다워 일행을 따라 오순도순 산길을 걸어보았습니다. 숲에서 맞는 아침 날씨는 쌀쌀하지만, 따스한 볕과 바람에 부딪치는 나무소리가 완연한 가을을 말해주었습니다. 저 멀리 보이는 풍경과 서울에서는 맡을 수 없는 나무냄새까지... 이거야말로 힐링이구나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정상을 향하는 여행자들 (사진: 윤준식 기자)
◇ 목장지기와의 시간
산행을 이끈 사람은 산너미목장의 임성남 목장지기입니다. 함께 산을 오르는 동안 두런두런 산너미목장의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제일 먼저 그에게 물어본 것은 신비한 느낌을 주는 돌탑에 얽힌 사연이었습니다. 돌탑쌓기는 원래 목장지기 아버님의 취미였다고 합니다. 목장 바닥에 흩어져있던 돌들을 정리할 겸 쌓게 되었는데, 나중에는 온 가족이 함께 만든 공동작품이 되었다고 하는군요. 태고의 세월을 품은 돌들이 200기의 탑이 되어 산너미목장의 역사를 지켜보았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숙연해지기도 합니다.
목장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는 임성남 목장지기 (사진: 윤준식 기자)
산너미목장의 시작은 목장지기의 증조 할아버지 때부터라고 합니다. 화전민 20여 가구가 이곳에 들어와 개척하며 터전을 일구었는데, 80년대 들어오며 사람들이 도시로 떠나버려 지금은 산너미목장 가족들만 남았습니다.
산너미목장의 역사를 시작으로 많은 이야기들을 들으며 산책하다보니 어느새 정상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뱃속에서 꼬르륵... 이른 아침부터 먼 길을 떠나오니 상당히 시장하네요. 그러나 손님맞이에 빈틈이 없는 평창의 민심을 여기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정상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마리아주 ‘Forest breeze’ (사진: 윤준식 기자)
◇ 산 정상에서 즐기는 마리아주 ‘Forest breeze’
평창 삼부자산양삼으로 알려진 조성근 청년심마니가 삶은 감자와 오늘의 마리아주 ‘Forest breeze’를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른 주먹보다 큰 감자는 조성근 씨가 직접 키운 감자입니다. 삶은 감자의 구수함도 좋았지만, 산삼주와 오미자 청을 섞어 만든 칵테일은 별미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강원도 산 꼭대기에서 마리아주라니! 게다가 숲 속의 산들바람이라는 뜻의 ‘Forest breeze’라는 이름도 아주 멋집니다. 삼 향과 새콤달콤 톡 쏘는 듯한 오미자 향이 결합해 입맛을 확 돋워 주었습니다. 그 덕에 감자가 꿀맛이네요! 그러나 이건 오늘 준비된 모든 순서의 에피타이저에 불과했습니다.
삶은 감자의 맛이 꿀맛! (사진: 윤준식 기자)
◇ 하나씩 베일을 벗는 주빵페어링 식탁
정상에서 내려와 산너미목장의 뜰에 도착하니 영화에서나 볼 듯한 풍경이 펼쳐집니다. 푸른 산등성이 사이에 하얀 휘장이 쳐진 멋지고 우아한 식탁이 펼쳐져 있습니다. 휘장 아래의 식탁에는 80명의 손님들이 길게 두 줄로 마주 보며 자리했고, 이 특별한 연회를 위해 많은 분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식탁을 더욱 멋지게 만든 건 테이블 위에 올려진 알록달록한 치즈들입니다. 이 치즈들은 젖소 220두를 키우고 있는 6차산업형 목장인 보배목장에서 생산한 치즈입니다. 동글동글하고 앙증맞은 모양의 고다치즈와 형형색색 무지개 스트링 치즈는 눈으로 먼저 먹고 입으로 맛을 본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듯합니다. 짭조름하지만 고소한 치즈가 계속해서 입맛을 다시게 만드는군요.
이제 본격적인 강원전통주와 평창의 메밀을 재료로 한 빵을 조합한 ‘주빵(酒bread) 페어링’ 식탁이 시작됩니다. 5가지 코스 구성은 평창에서 생산되는 메밀을 주재료로 다양한 빵을 개발하고 있는 ‘브레드메밀’ 최효주 제빵사가 맡았습니다.
강원도전통주와 평창 메밀을 재료로 만든 빵의 조합은 어디까지 우리의 미각을 만족시켜줄 수 있을까? (사진: 윤준식 기자)
평창 보배목장이 생산한 고다치즈와 무지개 스트링 치즈 (사진: 윤준식 기자)
◇ 제1코스: 평창서주 감자술과 요거트빵
첫 번째 코스는 평창서주 감자술과 요거트 빵입니다.
요거트 빵은 직접 생산한 유제품으로 소문난 평창 보배목장에서 생산된 요거트를 넣고 반죽한 메밀빵입니다. 비트도 함께 곁들여졌는데, 인근 농장에서 생산된 것을 최효주 제빵사가 직접 먹어보고 고른 식재료들이라는군요. 바알간 색이 아름다운 비트는 사실 어울리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색다른 조합이었습니다. 다양한 색의 조화를 이루면서도 ‘빵’하면 떠오르는 텁텁한 이미지를 날려버리며 코스 메뉴의 첫 순서를 잘 열어주었습니다.
감자술은 약 13도 정도의 술로 청하와 비슷한 느낌의 술입니다. 목넘김의 부드러움도 청하와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 부드러움에 꼴깍 한 입에 털어넣는 느낌이 좋습니다. 하지만 맛은 탁주에 가까워 빵과 잘 어울렸습니다. 감자가 가진 구수함과 텁텁한 기운이 술 속에도 고스란히 묻어났습니다. 텁텁함이 느껴지는데도 목넘김은 부드러워 지금까지 마셔봤던 술들을 떠올리며 홀짝이는 즐거움을 주는군요.
보배목장에서 생산한 요거트로 반죽해 만든 메밀빵과 평창에서 재배한 비트의 조합 (사진: 윤준식 기자)
평창서주에서 생산한 감자술 (사진: 윤준식 기자)
◇ 제2코스: 옥수수 생동동주와 평창삼합
이어 옥수수막걸리가 식탁으로 나옵니다. 이쯤에서 어떤 빵이 페어링되어 나올지 궁금해지는데요? 지금껏 막걸리빵은 먹어봤어도, 빵에 곁들여 막걸리를 마셔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빵을 한 쟁반 들고 나타난 최효주 제빵사님이 “‘막걸리하면 삼합’이라 메밀빵을 베이스로 한 ‘평창삼합’을 준비했다”고 설명해 줍니다.
보통 삼합이라 하면 홍어와 묵은지, 삼겹살을 3겹으로 겹쳐 먹는 메뉴를 떠올리게 되지요. 삭힌 홍어의 향과 얼얼한 자극 때문에 홍어를 부담스러워 하는 분들도 홍어삼합은 즐겨 먹곤 합니다. 그런데 평창에서 나는 먹거리 중 자극적인 음식은 없을 텐데, 무엇이 우리의 입맛을 즐겁게 해줄까 궁금해집니다.
접시에 나눠주는 빵을 살펴보니 메밀빵을 베이스로 훈제연어와 산초 장아찌가 올려졌습니다. 베이스가 되어준 빵의 묵직함, 훈제연어의 부드러움, 산초 장아찌의 새콤톡톡함 어우러진 맛이 참 재미있습니다. 평창삼합을 우물거리며 옥수수막걸리를 한 모금 마셔보니 옥수수막걸리 특유의 고소한 단맛이 정말 안성맞춤입니다.
"막걸리엔 삼합!" 그리하여 평창삼합! (사진: 윤준식 기자)
감자술에 이은 강원도의 술은 옥수수 생동동주 (사진: 윤준식 기자)
◇ 제3코스: 메밀맥주와 메밀빵 3종세트
코스 세 번째는 평창 산기슭에 자리잡은 화이트 크로우 브루잉에서 생산된 메밀맥주와 3종의 메밀빵입니다. 맥주의 라벨 디자인이 너무 재미있습니다. 영어로 ‘GORANI’라 쓰여 있어 수입맥주처럼 보였는데, 자세히 보니 점프하는 고라니의 실루엣이 그려져 있네요.
치맥, 감맥, 요즘은 피맥 등 맥주와 어울리는 안주 세트가 다양하지만 구수하고 담백한 메밀빵을 곁들인 빵맥이 이렇게 환상적인 궁합인 줄은 몰랐습니다. 함께 나온 빵은 고다치즈바게트, 소금버터빵, 올리브 빵으로 짭조름한 고다치즈바게트와 소금버터빵은 맥주와 잘 어울리는 빵이었습니다.
올리브빵은 빵 반죽의 흰 색과 올리브의 거뭇함이 대비되어 계속해서 눈길을 사로잡았는데요... 빵의 적절한 폭신함에 올리브의 시크름한 향과 설컹거리는 식감이 좋아 계속해서 “빵 하나 더 주세요!”하며 식탐을 내게 만들었습니다.
메밀을 재료로 한 소금버터빵, 고다치즈바게트, 올리브빵 (사진: 윤준식 기자)
충동적으로 '고탄저지식'을 결심하게 만든 올리브빵 (사진: 윤준식 기자)
평창 화이트 크로우 브루잉이 생산한 메밀맥주 '고라니' (사진: 윤준식 기자)
◇ 제4코스: 김삿갓 예밀와인과 흑염소 불고기 샌드위치
보통 고급 레스토랑에서 즐기는 코스요리로 따진다면 이때 즈음 메인디쉬인 스테이크가 나올 타이밍입니다. 이번 주빵페어링 식탁에서도 그런 메인디쉬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흑염소 불고기 샌드위치’와 예밀와인입니다.
샌드위치에 사용할 빵으로 암갈색의 메밀바게트를 골라 앞선 3가지 주빵페어링과 색의 대비를 이루며 맛의 차이를 시각적으로 느끼게 해줍니다. 불고기 사이에는 야채를 섞어 색과 맛과 영양의 균형도 맞췄습니다. 도드라지는 핑크색 식물은 메밀싹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식욕이 자극됩니다.
흑염소 고기가 몸에 좋은 것은 알지만, 특유의 냄새가 있어 거부감을 갖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곳 산너미목장은 육가공과 숙성비법을 통해 잡내가 나지 않게 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지금 출하된 흑염소 고기는 가을의 도토리를 먹고 성장한 후라 고기 맛에 도토리 특유의 쌉사롬함이 가미되어 있습니다. 도토리 껍질 속의 탄닌성분 때문이라고 하는데요, 이 때문에 예밀와인의 상큼한 맛과 향과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메밀 바게트와 흑염소 불고기가 만났다 (사진: 윤준식 기자)
상큼한 향과 맛을 자랑하는 예밀와인 (사진: 윤준식 기자)
◇ 제5코스: 평창산삼주와 보양식빵
아쉽게도 이제 마지막 페어링만 남았습니다. 마지막은 멀리서 오신 귀한 손님들의 건강을 기원하는 산양삼을 재료로 한 평창산삼주와 보양식빵입니다. 처음 마셔본 평창산삼주의 느낌은 높은 도수가 주는 후끈한 힘이었습니다. 게다가 몸에 좋은 산양삼이 들어있다고 하니 스태미너가 증가한 듯한 착각도 들었는데요...
작은 케이크처럼 썰어 눕힌 보양식빵 위에는 유자청에 담근 밤과 산양삼채가 토핑으로 올라가 있습니다. 유자청의 달달함 속에 산양삼의 쌉사롬함, 게다가 밤이 지닌 구수함이 합쳐져 ‘단쓴단쓴’의 콜라보가 완성되었습니다. 손길이 계속 가는 것을 말릴 수 없네요.
유자청에 산양삼과 밤을 채썰어 담근 토핑이 단쓴단쓴한 맛을 연출한다. (사진: 윤준식 기자)
산양삼을 원료로 담근 평창산삼주 (사진: 윤준식 기자)
◇ 별미 흑염소 바비큐와 숲 속 아트클래스
사실 이것 외에도 즉석에서 흑염소 바비큐 시식회도 열렸습니다. 도시에서 많은 손님이 오신 것을 기뻐하며 목장지기가 한 턱 낸다며 예정에 없던 메뉴가 하나 더 늘어난 건데요, 덕택에 처음으로 흑염소 고기를 맛볼 수 있었고, 식탁과 바비큐 그릴을 오가며 즐거운 맛의 향연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흑염소 고기는 껍질부분은 졸깃한 식감을 즐길 수 있었고, 안의 육질은 부드러워 흔히 먹어보던 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와는 차원이 다른 맛이었습니다. 특히 자연을 뛰어놀며 몸에 좋은 것만 먹고 자란 흑염소라 그 맛 또한 특별했는데요... 흑염소 고기의 이야기는 또 다른 기회에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예정에 없던 흑염소 바베큐로 맛의 즐거움은 배가 되었다. (사진: 윤준식 기자)
코스를 마무리할 즈음 산 속의 태양도 서편으로 뉘엿뉘엿 넘어가며 긴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하네요. 오늘 느낀 맛을 집에 가져가자는 취지의 ‘식경험 디자인 워크숍’이 남았습니다. 강은경 식경험디자이너의 지도로 ‘전통주 레이블 디자인’을 해보는 숲 속 아트클래스가 그 자리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각자 주어진 술병에 알록달록한 스티커를 이용해 술병을 꾸미기 시작했는데요, 오래간만의 미술시간이 시작되자 쭈뼛거리면서도 각자 개성 넘치고 아기자기한 작품을 하나 씩 만들어 내었습니다. 모두가 만든 작품을 한 자리에 모아보니 이 또한 너무 신기하고 즐거운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단순히 먹고 마시다 끝나는 먹기 바쁜 행사가 아니라 너무 좋았습니다. 답답한 서울에서 벗어나 오랜만에 맛있는 공기와 푸르른 자연을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좋았고, 평창 로컬푸드의 특성을 알 수 있어 좋았고, 평창이 길러내는 먹거리의 건강함과 우수함이 좋았던 여정이었습니다.
모두가 만든 작품을 한 자리에... (사진: 윤준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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