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모가 초등학교 입학 시기를 어느 정도 결정할 수 있게 된다면, 한 가지 긍정적인 변화가 기대됩니다. 특별한 자격도 없이 한두 해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사회적 권위를 부여받는 악습이 자연스럽게 폐지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나이에 지나치게 민감합니다. 어른이든 어린이든 갈등이 생기면 상대가 몇 살인지부터 묻습니다. 한 살이라도 더 많으면, 상대에게 각종 예의 범절을 강제할 권리라도 가졌다는 듯이 행동합니다.
참 기묘한 관습입니다. 전통이라고 부르기에는 역사가 너무 짧고, 사회 규범이라고 부르기에는 마땅한 근거가 없습니다.
흔히 나이에 권위를 부여하는 관습을 유교 전통이라고 부르지만, 유교에 그런 내용 따위는 없습니다. 류성룡과 이순신, 이덕형과 이항복, 이이와 이황 등, 우리나라 역사에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도 대등하게 존중하며 지낸 사람들이 많습니다.
흔히 거론되는 장유유서(長幼有序)도 나이가 아니라 친족 간의 항렬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모르는 사람 사이에 간섭하는 덕목이 아니었습니다. '망년지교(忘年之交)', 나이를 잊고 서로 존대하며 교우 관계를 갖는 것이 오히려 유교 문화권의 전통입니다.
유교에 절대 복종은 없습니다. 맹자는 역성 혁명을 유교적인 이유로 정당화했습니다. 성리학이 발전한 송나라에서는 선비들이 대놓고 황제의 절대 권력을 부정하고 유럽의 귀족 공화정에 가까운 정치 체계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또 다른 성리학 국가인 조선에서도 왕이 할 수 없는 일이 엄연히 정해져 있었습니다. 왕이 규범을 어기면 관료들은 기꺼이 반정을 일으켰고, 성리학의 종주국이었던 명나라는 전후사정을 살피고 이유가 정당하면 얼마든지 새 왕을 공인해 줬습니다.
유교는 위계 질서를 중요하게 여겼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각자에게 사회적 역할과 책임을 부여해서 평화롭고 질서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지, 단순히 누군가를 지배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왕은 왕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남편은 남편답게, 아내는 아내답게. 어른은 어른답게, 아이는 아이답게. 이게 유교 윤리였습니다. 자기 지위에 어울리지 않게 행동하는 사람은 제 아무리 왕이라도 비난받고 쫓겨났습니다. 왕이 없는 민국에서 사는 현대 한국인은 대체 무슨 자격으로 권위를 누리는 걸까요?
우리나라 전통에 크게 영향을 미친 외래종교, 기독교 역시 이런 악습과 무관합니다. 기독교도 하늘이 정한 위계 질서를 존숭했지만, 기독교의 핵심은 모든 사람이 신 앞에서 동등하게 소중하다는 도덕적 평등 사상이었습니다.
이런 도덕적 평등 사상을 급진적으로 받아들인 신학자들은 유럽 공산주의 운동의 시초가 되기도 했습니다. 기독교가 수백 년 넘게 뿌리내린 나라는 그 어느 곳보다도 상호 존중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괜히 유럽에서 자유와 평등, 사회 연대가 발달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나이에 따라 서열을 나누는 악습은 결코 전통적이지 않습니다. 우리 조상은 요즘 꼰대처럼 살지 않았습니다.
우리 전통을 살펴보지 않더라도, 나이에 따라 권위를 부여하는 악습은 정당화되지 않습니다. 어떤 질서가 정당한 사회 규범이 되려면 정의로워야 합니다. 정의롭지 않은 질서는 부당한 규범입니다.
흔히 우리는 각자에게 각자의 것을 보장하거나, 각자의 영역을 존중하거나,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이익을 주는 질서를 정의롭다고 말합니다. 나이에 따라 권위를 부여하는 악습은 이 중에서 어느 것에도 해당하지 않습니다.
각자에게 각자의 것을 보장해야 한다는 생각은 가장 오래된 정의관입니다. 고대 지중해 세계를 통치한 로마법은 이 원칙에 따라 세워 졌습니다. 이 원칙은 흔히 '응분의 원칙'이라고 불립니다.
응분의 원칙을 잣대로 생각해 보면, 권위는 아무에게나 주어져서는 안 됩니다. 권위는 보상이자 권력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보상과 권력은 마땅히 자격 있는 사람에게 부여되어야 하고, 그 자격은 보통 사회적 기여나 능력을 말합니다. 사회적 기여도, 능력도 불분명한 사람에게 권위를 허락한다면, 그 사회는 불의한 곳이 될 것입니다.
각자의 영역을 존중하는 것, 다시 말해서 개인적 자유를 잣대로 봐도, 나이에 따라 권위를 부여하는 질서는 부당합니다. 나이에 따라 권위가 부여된다면, 우리는 법적, 공익적 근거 없이 다른 사람에게 굴종해야 합니다. 권위가 제한되지 않는 사회에, 개인적 자유는 설 곳이 없습니다.
최대 다수의 이익을 잣대로 생각해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당한 굴종을 강요하는 사회는 생산성도 혁신성도 챙길 수 없습니다.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기여에 따라 보상할 때, 각자가 대등한 관계에서 협력하고 경쟁할 때 생산성과 혁신성을 키울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꼰대들의 사회는 언제나 정체되어 있을 뿐입니다. 정체된 사회는 공공 이익을 증진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나이에 권위를 부여하는 악습은 어떠한 정당성도 없습니다. 이 악습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자존감과 합리적 추론 능력이 낮은 사람들에게 타인을 괴롭힐 자유를 허락할 뿐입니다. 마땅히 폐지되어야 합니다.
다만, 국가가 직접 악습을 폐지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악습은 마약과 같습니다. 불특정 다수가 권위에 취해 있기 때문에, 국가가 법으로 처벌하려 해도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애초에, 법으로 처벌하기 위해 죄목을 만드는 일부터 쉽지 않을 것입니다. 억울한 사람이 나오지 않도록, 최대한 구체적으로 죄목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는 언어의 한계 때문에 매우 어려운 작업입니다. 당장 위성정당을 금지하는 법을 만드는 일도 만만치 않아서 실질적으로 시도되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어릴 때부터 나이가 다른 사람과 대등하게 어울리도록 유도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시간이 지나 악습이 자연스럽게 도태되도록, 정부가 새로운 문화가 형성될 인프라를 공급해야 합니다. 초등학교 교실 내 연령을 다양하게 만드는 일이 그런 인프라가 되어 줄지도 모릅니다.
<저작권자 ⓒ시사N라이프> 출처와 url을 동시 표기할 경우에만 재배포를 허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