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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분권_이야기(13)] 포용이 필요할 때

1부: 21세기 지방분권 #10

조연호 전문위원 승인 2022.08.31 00:19 의견 0


칼 폴라니의 위대한 저서 『거대한 전환』에서는 정치와 경제는 뗄 수 없는 관계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치를 말하면 당연히 경제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 경제와 함께 등장하는 용어가 있습니다. 바로 ‘포용(Inclusive)’입니다.

잠시 ‘포용 경제’와 관련해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2008년 세계 금융 위기가 도래하기 전까지 세계 경제는 ‘신자유주의’ 깃발 아래 집결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깃발은 쉽게 내려지지 않을 듯했습니다.

낙수효과, 대마불사 등이 이 시대를 대변했습니다. 하지만 말이 좋아서 자유주의지, 힘이 있는 국가는 자유를 가장한 폭력을 얼마든지 행사할 수 있었고, 약소국은 그런 횡포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던 시대였습니다. 세계 역사가 항상 그랬듯이 누구에게나 보장된 자유가 아니라 힘이 없으면 자유를 누릴 수 없었던 시대였습니다. 유사이래 자유와 평등을 동시에 누렸던 시대는 없었습니다. 현재도 마찬가지고요.

이 시기 우리나라도 많은 국가와 FTA(자유무역협정)를 체결했습니다. 국가들이 무역할 때 관세가 없다면, 낮은 가격으로 물건을 살 수 있으니 소비자에게는 득이 됩니다. 그러면, 당연히 구매가 더 많이 이뤄지겠죠. 이후에는 기업이 성장하고, 국가는 더 많은 세금을 거둬서 국민을 위해서 더 좋은 일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 아주 합리적인 선순환구조가 이뤄진다면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건 합리적인 인간이 사는 세상이 톱니바퀴처럼 돌아갈 때의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항상 합리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많은 연구에서 밝혀졌습니다. ‘행동경제학’이 최근에 부상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이성적이고 합리적 인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니얼 카너먼의 『생각에 관한 생각』에서는 관습 등에 따라서 바로 반응하는 인간과 신중하게 생각한 후 행동하는 인간이 한 인간 내부에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대체로 인간은 전자에 더 가까우니 오류가 많다는 것이죠.

그러다 보니, 이후 리처드 탈러는 『넛지』라는 해결책을 제안하기도 했고요. 인간은 기계가 아닙니다. ‘욕망’의 동물이기도 하고요. 즉, 여러 변수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의미입니다. 도덕, 윤리, 감정, 이성, 혈연, 학연, 지연 등 다양한 요소가 존재하죠. 그러니 선순환에 대한 기대는 그야말로 ‘유토피아(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없는 장소’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입니다.

‘신자유주의’에서 주장한 ‘성장을 바탕으로 한 낙수효과’는 망상에 불과했습니다. 오히려‘빈익빈 부익부’를 심화 시켰을 뿐이죠. 결국, 세계에서 가장 잘 산다는 미국에서 금융 위기가 터지고 전 세계에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신자유주의를 실패했다고 선언하고 포기합니다. 스스로 포기한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포기한 것이죠. 그러고 나서, 새롭게 등장한 개념이 ‘포용’입니다.

포용은 ‘혼자’만 잘 사는 게 아니라 ‘함께’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쉽게 생각해서 빈곤층도 일정 수준으로 살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부자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청소년들도 자주 들어서 알고 있는 ‘최저임금’ 논의가 활발해진 시점도 ‘포용 경제’의 등장 시점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최근에는 ‘최고 임금’이라는 개념도 등장한 상황입니다.

샘 피지개티는 『최고 임금』에서 평등을 위해서는 CEO등이 받는 임금 수준을 적정 수준으로 제어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이 전에 토마 피케티는 『21세기 자본』에서 자본세를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론적으로 보면, 가능해 보이는 일이지만 역시 이상적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최저임금 1만 원에 대한 논쟁이 몇 년 전부터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저 임금 1만 원을 지급하는 국가는 많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1만 원은 우리 경제 수준에 걸맞지 않다는 의견이 등장한 것이죠.

2022년 최저임금 기준은 9,160원입니다. 아직 1만 원을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가 상승률을 고려하면 1만 원이 넘는다고 하더라도 몇 년 전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떨어졌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최고임금은 최고 직급자의 연봉이나 월급을 일반 직급 자 수준의 4-7배 수준으로 정하자는 논의입니다.

현재는 일반 직원들 보다 몇 백 배 이상의 연봉을 받는 CEO등이 수두룩하니, 최고 임금이 실행되면, 평직원들의 소득이 오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대적 박탈감에서 벗어날 수도 있고요.

그러나, 최저 임금 1만 원 시대를 여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최고 임금인 듯합니다. 과연 어떤 사람이 현재 받는 자신의 연봉을 깎으려 할까요? 자본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본세는 결국, 상속받은 자들이 내야 할 세금입니다. 그러나 탈세를 감행해가면서까지 물려받은 부를 유지하려고 하는 데, 이러한 법이 쉽게 만들어 질 수 있을까요? 법을 제정하는 기구는 국회인데, 국회의원들은 기본적으로 일반인들보다 부자입니다. 그러다 보면, 당연히 서민들의 편이 아니라 부자들의 편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울러 인간의 욕망, 허영 등을 고려한다면 역시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도 앞으로 세계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는 ‘포용’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이런 ‘포용’ 을 정치적으로 적용하면, 당연히 보편적 복지의 확대일 것입니다. 실제로 ‘포용적 복지’라는 개념도 등장했고요.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포용은 평등과는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은 이상적인 개념이지, 현실적으로 도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국가, 사회, 지역, 가정 등에서 완벽한 평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론, 생명이 중요하고, 교육의 기회 등이 공평하게 주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내 목숨과 대통령의 목숨이 같지 않고, 교육의 기회도 가진 자들의 자녀들이 누리는 것만큼 일반인들의 자녀들이 누리지 못하는 게 현실입니다. 역사적으로 살펴 볼 때, 결과의 평등을 이상으로 삼고 등장한 공산주의조차도 평등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가령 국가 시스템이 개선된다고 하더라도 삼성 전자의 이재용 부회장과 필자가 경제적으로 평등하게 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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